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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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장애를 통해 돌봄을 배우다칼럼 2025. 2. 28. 02:31
염운옥 아버지를 돌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었다. 2014년 늦가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아버지는 당뇨합병증으로 오래 고생했다. 30년 넘게 진행된 당뇨는 혈관, 신장, 족부, 눈, 뇌 등 온갖 신체 기관에 합병증을 일으켰고 그 결말은 말기신부전증과 시각장애와 인지저하증이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주로 돌봤지만 장녀인 나도 한몫을 맡았다. 2010년부터는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면서 어머니와 내가 ‘주역’을, 따로 가족을 이룬 남동생이 ‘조역’을 맡아 아버지 돌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외래진료를 위한 정기적인 종합병원 방문은 물론 몇 달에 한 번씩은 새벽에 응급실로 달려가야 했다. 투석만큼은 피하고 싶었으나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는 혈액투석을 받아야 했다. 체력이 쇠해지면서 섬망과 치매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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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는 어쩌다가 ‘안보’의 문제가 되었나칼럼 2025. 2. 27. 00:16
‘이주’는 어쩌다가 ‘안보’의 문제가 되었나- ‘국경 통제’와 동시에 구축되어야 할 ‘국경 투쟁’을 모색하며 심아정 이주의 ‘안보문제화’와 이주민의 ‘범죄화’, 그 연원을 찾아서 화성외국인보호소 면회 활동을 통해 외국인보호소가 ‘국가보안시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면회자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거나 녹음도 할 수 없게 되어 있는데, 과연 갇혀 있는 사람들이 국가안보에 어떤 ‘해’(害)를 가한다는 것인지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국경을 넘어온 이들이 ‘국민의 안전’과 ‘공공의 질서’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발상에는 자연스레 ‘가짜 난민’, ‘불법’, ‘범죄자’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화성외국인보호소 면회실 사진. 상단에 “이곳은 국가보안시설이므로 일체 사진촬영을 금지합니다”라는 문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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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직후 일본의 ‘낙태지시’와 여성들의 ‘임신중지’ 사이의 정치적 틈새칼럼 2024. 8. 28. 00:48
패전 직후 일본의 ‘낙태지시’와 여성들의 ‘임신중지’ 사이의 정치적 틈새-후쓰카이치 보양소 답사를 통해 뒤늦게 마주한 전후의 실종된 재생산정의 심아정 히키아게(引揚げ, 이하 인양 혹은 귀환)는 전쟁과 식민지 종주국 국민으로서 해외에 살던 일본인이 패전 이후 귀국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패전 당시 해외에는 일본의 군인·군속 및 일반인이 660만명 이상 체류하고 있었다. 중국 동북부(구 만주)에서 소련군의 참전으로 전투에 휘말린 사람들이 비참한 상황에 처했던 경험은 일본 내에서도 가해국 국민이 겪은 ‘피해 서사’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다. 1946년 말까지 500만명을 넘는 이들이 귀환했고, 1958년 이후로는 개별적으로 돌아왔다. 열 아홉 개의 귀환항에는 1945년 10월 점령군 총사령부(GHQ)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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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과 주체: 민주주의를 향한 길 위에 선 한국 여성들을 찾아서칼럼 2024. 8. 28. 00:47
펑 위안(Feng Yuan) 나는 한국의 여성 운동이 ‘민중 운동’과 함께 권위주의나 군사 독재 정권의 억압적인 통치기에도 살아남을 만큼 강력하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피비린내 나는 고난의 과정 속에서 한국 여성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특별한 역사적 장소를 올해 봄과 여름이 되어서야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파주 비무장지대가 이번 방문의 첫 번째 목적지는 아니었다. 나에게 그곳은 전후 회복과 트라우마 치유라는 한국의 얽히고설킨 역사적 과정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게 이미 주입된 입장과는 상반된 것이었기 때문에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중국의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내게 주입된 첫 번째 기억은 북한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미군과 남한 ‘괴뢰’ 정부를 물리친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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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네덜란드의 난민 수용 체계는 어떻게 다른가?칼럼 2024. 2. 28. 03:31
사라 아메드 올해는 이집트 혁명과 아랍의 봄 혁명이 일어난 지 13주년이 되는 해다. 2011년 1월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 혁명의 도화선은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한 광장에서 다른 광장으로 옮겨붙기 시작했다. 전세계인들은 그 나라들이 자국의 상황을 이미 잘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정체된 것처럼 보이는 수면 아래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많은 이들이 알아차리지 못했다. 독재정권들은 모든 것이 무한정 자신들의 손아귀에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랍의 봄이라 불렸던 중동은 점차 내전과 정치적 불안의 지옥으로 변해갔다.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희망이 잠깐 엿보였지만, 중동 사회는 군사 국가의 모루와 정치적 이슬람의 망치 사이에 갇혀 있었다. 이집트나 튀니지 같은 나라에서 정치적 이슬람이 집권한 것은 분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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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소한 세계와의 싸움을 위하여칼럼 2024. 2. 28. 03:26
명길 도미야마 이치로는 「전후 일본의 오키나와론, 그 곤란과 ‘시작의 앎’」 에서 폭력 안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폭력이 상주하는 공간의 역사성을 지닌 오키나와가 사회운동의 지형 안에서 어떻게 ‘다르게’ 존재하는지를 따라가는 글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지역성 안에 존재해 온 삶의 맥락을 그 밖에서 재구성하는 관점들의 문제에 대해 뼈저리게 짚어낸다. 그는 한 챕터를 폭력에 관해 쓰는 것으로 할애하고 있다. 2004년 후텐마 기지 미군 헬기 추락 사건을 기점으로 오키나와의 사람들은 1959년의 헬기 추락 사건까지 함께 떠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폭력에 노출되어 온 사람들은 항상 하늘을 쳐다보며, 혹시나 헬기가 떨어지지는 않을지 조심하며 머리를 감싸는 생활을 이어나가게 된다.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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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여성들의 목소리 (Iranian Women Speak Up)칼럼 2023. 8. 30. 12:28
사라 아메드 이란에서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게 두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당신이 여성이라면 그러하다!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이란 당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란의 여성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조차 금지되어 있어서, 원하는대로 옷을 입거나, 발언하거나, 자신을 방어하거나, 가부장적 체제에 반대하는 말 한마디도 할 수 없다! 남성이라면 누구나 당신의 복장이 부적절하다고 여기거나 히잡을 쓰지 않은 것을 보고 당신을 경찰서에 데려갈 수 있다! 그 남성이 낯선 사람이라도 상관없다. 이란 정부 당국이 마흐사 아미니에게 저지른 범죄가 알려진 후 이란에서 시위가 폭발한 주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마흐사 아미니는 폭력적으로 경찰서로 연행되어 감금당하고 모든 인권을 침해당한 끝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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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한 단절, 서슬 퍼런칼럼 2023. 8. 30. 12:28
명길 미끈 매끈한, 정돈된 도시의 인프라들을 떠올린다. 나는 채식인으로 살기 좋은 도시 중에 하나일 베를린에서 채식인으로 살면서도, 이 도시의 비건 식당들에 매력을 못 느끼고 있다. 어느 식당 어느 카페에도 채식을 위한 선택지가 있음은 정치적인 일이자 생활의 편리이고, 또 사소하게는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컨셉과 이미지로 구성되는 소비주의의 도시 안에서 멋지고 예쁜 비건 식당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비정치화되어 라이프스타일로 존재하는 비거니즘은 단순히 ‘퇴색’이라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먹고 사는 일을 떠올려본다. 도시 밖에서의 생활을 생각해본다. 생명은 더럽고 찝찝하고 추잡하다. 채소와 과일은 상하고 곰팡이가 핀다. 흙이 묻어 있고, 매일매일 썩어가고, 끈적거리는 액체가 뿜어지는 것이 생물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