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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한 단절, 서슬 퍼런칼럼 2023. 8. 30. 12:28
명길
미끈 매끈한, 정돈된 도시의 인프라들을 떠올린다. 나는 채식인으로 살기 좋은 도시 중에 하나일 베를린에서 채식인으로 살면서도, 이 도시의 비건 식당들에 매력을 못 느끼고 있다. 어느 식당 어느 카페에도 채식을 위한 선택지가 있음은 정치적인 일이자 생활의 편리이고, 또 사소하게는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컨셉과 이미지로 구성되는 소비주의의 도시 안에서 멋지고 예쁜 비건 식당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비정치화되어 라이프스타일로 존재하는 비거니즘은 단순히 ‘퇴색’이라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먹고 사는 일을 떠올려본다. 도시 밖에서의 생활을 생각해본다. 생명은 더럽고 찝찝하고 추잡하다. 채소와 과일은 상하고 곰팡이가 핀다. 흙이 묻어 있고, 매일매일 썩어가고, 끈적거리는 액체가 뿜어지는 것이 생물의 삶이다. 동물의 죽음은 바로 근처에 존재한다. 예쁜 접시와 깔끔한 공간, ‘크루얼티 프리(cruelty free)’하다는 비건 음식은 그 모든 감각을 소거한다. 그 어떤 불쾌한 감각도 유발하지 않는 매끈매끈한 ‘경험’의 제공이 이 시대에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분명 균열이 있다. 균열을 더트다(잘 보이지 않는 것을 손으로 이리저리 만져 보며 찾는다는 뜻의 전라도 방언)보니, 나는 불유쾌한 상태에 대해 더 말하고 싶어 진다. 이 글은 따라서 울퉁불퉁하고 거친 단상들의 모음이 된다.
내가 목도한 사포질들을 떠올린다. 대학의 한 수업에서 교수는 “진정한 애도”에 대해 역설했다. 노라의 기억의 터, 공동 기억, 기념 문화 이런 이론들이 수업의 내용으로 쏟아진 뒤였다. 교수는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국가폭력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는, 대부분의 국가 폭력 관련 기억문화 전시가 죽음의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며 증명하려 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그러면서, “유족들은 벽돌 하나도 그대로 두고 싶어한다.”며 “진정한 애도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멜랑꼴리의 단계를 극복해야 한다.”라는 학자의 말을 인용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학자의 사포질이 향하는 곳은 유족들의 ‘세련’되지 못한 억울함이다. 투박한 요구와 함께 분노하는 폭력의 피해자들에게 멜랑꼴리를 빗대는 학자의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학자들이 세련된 전시를 논하며 품위 있는 이미지를 생성해낼 때 나는 과연 “진정한 애도”로 도달할 수 있게 될까? 전시라는 것은 살아있는 죽음의 박제이기도 하다. 이는 때때로 사회적 공인을 의미한다. 그러한 공인의 대상으로서만 전시 공간에 입장할 수 있는 불화의 응어리는 사포질을 피하기 어렵다. 고통을 그대로 재현해서라도 공감을 얻고 싶어하는 마음은 가공되고 나서야 새하얀 전시실에 입장할 수 있다.

한 폐건물ⓒ신명길_전라남도 장성_2020 나는 벽돌 하나도 보존하고 싶어하는 애끓는 마음을 안다. 무엇 하나에 열을 내고 나면 돌아서서 부끄러워질 정도로, ‘쪽팔리게’ 분노하는 스스로를 안다. 주체할 수 없는 증명의 욕구가 내 단전에 머무른 채로 도저히 사라지지 않는 기분을 안다. 호남 혐오에 무지한 이들에게 오월 광주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그랬고, 퀴어 혐오자에게 스스로가 성소수자임을 밝혀야 할 때 그랬으며, 모두가 평등한 학회라 믿는 이들에게 내가 5분 전 겪은 인종적 마이크로 어그레션(micro aggression)에 대해 설명해야 할 때 그랬다.
그 ‘억하심정’은 논리적이거나 정당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기 일쑤다. 이어 나는 설득하기를 그만 둔다. 설명하기를 포기한다. 이해 받기를 원치 않는다. 더이상의 연결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당신들은 모른다’로 시작되는 억울함의 내러티브는 시의적절하지 않다는 인상을 풍긴다. 이세상은 모두 연결 되어있고, 설득을 통해 투쟁해야 한다는 ‘커넥션’의 글로벌리즘과 정반대의 기로에 서있다. 나는 이 초국적 네트워크에 연결되기를 그만둔다.
하지만 억울하게 끓고 있는 나의 ‘노프라이드(no pride)’, 당신과 나는 연결될 수 없다는 시그널은 계속 발산 중이다. 연결을 바라지 않는 균열이 여기에 있다. 이 균열은 교차성의 정치와 일정 부분 반목하기 시작한다. 정체성의 정치와도 단절된 채로 머무른다. 설명되지도, 설득하지도 않은 채로 존재하는 껄끄러움. 이 요철에 대어지는 사포질을 거부한다.

노프라이드 파티 서울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던 날, ‘노프라이드 파티’가 열렸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파티는 자긍심(pride)과는 단절된 선언을 한 퀴어들의 파티였다. 주최측에 따르면, “어딘가에 갇힌 삶, 초국적 기업의 착취 대상인 삶, 경찰의 단속 대상인 삶, 삶의 조건이 불법인 삶”이 있으며 이러한 삶이 퀴어가 살아가는 자리이자 퀴어 정치의 자리라는 의도 하에 파티를 기획했다고 한다. 파티의 취지는 약물사용자, 성노동자, 미등록이주민, HIV 감염인을 범죄화하고 단속하는 현실을 겨냥했고 나아가서는 퀴어 행사와 퀴어 커뮤니티가 이러한 삶과 ‘연결’되지 않는 현상을 드러내고자 한다고 밝혔다.
취지문에서는 “우리는 퀴어가 정상 사회의 긍정과 존중을 얻는 일에 방해가 되는 속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퀴어, 못생긴 퀴어, 춤을 출 줄 모르는 퀴어, 멍청한 퀴어, 더럽고 불쾌한 퀴어, 범죄자인 퀴어, 아픈 퀴어, 병을 전파하는 퀴어가 바로 우리들입니다.”라는 문구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불화, 노프라이드의 표출은 자긍심 가지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행위이다. 정상성의 사회를 향한 발화를 중단하는 행위이다.
나는 계간 〈문학동네〉 2023년 여름호에 실린 정민우의 「불가능한 퀴어 이론」을 읽고, 이 분노를 보관하기 시작했다. 정민우의 글을 읽으며, 그동안 내가 가져왔던 어긋남 자체에 대한 욕망을 확인하기도 했다. 저자는 퀴어 연구를 위해 미국에 갔고, 퀴어 이론 연구의 ‘특권적 장소’에서 아시아 퀴어 연구가 ‘충분히 퀴어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대학에서, “그들은 빠르게 변하는 학술 트렌드에 발맞춰 (중략) 연구 주제들을 찾아갔다. 아시아 성소수자 운동에 관한 내 사회학 박사 연구 계획은 그들에 비하면 투박하고 미련스럽고 뒤처져 보였다.”라고 저자는 회상한다. 스타 퀴어 이론 학자가 이론 기조를 발표하면, 그를 비서구 세계에 적용하는 일련의 독점과 불평등한 지식 노동 분업(북반구의 패권 부국들이 이론의 생산을 독점하고, 나머지 세계가 그 이론의 소비, 해석, 적용, 사례의 증빙을 담당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일종의 무력감이 찾아온다.
어쩌면 ‘매끄러움’의 반대편에는 정동의 식민지로서의 내 역사가 반영되었던 것일까? ‘나’는 정체성으로 환원되었을 때, 호남 출신 퀴어이자 사회주의자, 페미니스트이고, 아시안 여성이다. 지난 시간 내 투쟁 전략은 투신에 가까웠다. 나 스스로가 하나의 증거가 되어 타인의 정상성에 침범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지금은 설득과 증명을 관두기 시작했다. 요철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미끄러지는, 허울 좋은 세계로 이동해왔던 지난 삶에서 나는 단절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

Shambhavi 作 -Reaper's Melody2011/2018 ⓒ신명길_뉴욕 MoMA _2022 동시대 세계는 공감, 연결, 연대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진보 정치는 자본의 네트워크를 타고 변화의 내러티브를 홍보한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윤리적으로 완벽한 이미지는 소비 주체로 살아가는 ‘세계 시민’들이 불편함을 느끼게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세상에 완벽하게 올바른 것, 완벽하게 깨끗한 것, 완벽하게 윤리적인 것은 없다. 존재 자체가 ‘세계 시민’들에게 불편이 되는 삶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 삶의 복잡성은 이루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연결될 수 없는 순간들, 깎여 나가길 거부하는 마음들로부터 다시 세계를 파악한다. 연결을 위해 마모되는 것을 감수하지 말 것. 요철의 단호함에 공명할 것. 불쾌한 단절의 상태를 직시할 것.
단절을 구태여 미화하고 연결하려는 시도를 그만둔다면, 비로소 가장 정치적인 순간에 집중하게 된다. 요철의 삶은 토큰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려내어진 채로 박제되어, 시선을 받아 내기만 하면 되는 대상이 아니다. 연결을 거부함으로써, 안전한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퀴어한 [역사, 사회, 이론, 미술, 인종, 비인간, 성정치]이다. 규범이 보시기에 마음 편안하시라고 존재하는, ‘힙’하고 ‘쿨’한 퀴어는 이제 여기 없다.

구 전남도청 민원실과 소나무ⓒ신명길_광주광역시_2021 구 전남도청 앞 소나무에 대해 생각한다. “폭도들은 계단으로 내려갈 자격이 없으니” 나무를 타고 내려와야 했다는 증언이 거기 있다. 전시관으로 바뀐 구 도청 건물 밖 마당에서, 알음알음 기억하는 사람, 그 기억을 들었던 사람들만의 세계 속에서 그 소나무는 존재한다. 나무는 전시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민원실 2층, 최후의 투쟁으로부터 자격 밖의 삶이 예비된 지상에까지 시민군을 연결해준 뒤, 소나무는 시름시름 앓으며 지금까지 거기에 있다. ‘민주화 운동’이라는 단어 안에, 전시실 안에 들어가지 못한 감각들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나에게 남아있는 불발된 설득의 총알들은 여기 이 틈에 고여 있다. 그리고 그 틈에는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이성적인 단언 또한 남아있다. 교차의 점을 옹호하지도 않고 평행의 공감도 원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와 소비주의, 국가주의와 가족주의, 인간중심주의와 비장애중심주의, 서구중심주의와 제국주의. 이 모든 포섭의 시도들을 거부한다. 당신이 이해해줄 것이란, 이성을 향한 기대도 모두 철회한다. 그리고는 어떤 단절이 우리의 감정을 만들고 있는지 생각해야 할 뿐이다. 그럴 때에 ‘요철’은 세계를 향한 낫이 될 것이다.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존재로, 그렇게 공모의 세상을 겨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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