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생과 주체: 민주주의를 향한 길 위에 선 한국 여성들을 찾아서칼럼 2024. 8. 28. 00:47
펑 위안(Feng Yuan)
나는 한국의 여성 운동이 ‘민중 운동’과 함께 권위주의나 군사 독재 정권의 억압적인 통치기에도 살아남을 만큼 강력하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피비린내 나는 고난의 과정 속에서 한국 여성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특별한 역사적 장소를 올해 봄과 여름이 되어서야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파주 비무장지대가 이번 방문의 첫 번째 목적지는 아니었다. 나에게 그곳은 전후 회복과 트라우마 치유라는 한국의 얽히고설킨 역사적 과정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게 이미 주입된 입장과는 상반된 것이었기 때문에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중국의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내게 주입된 첫 번째 기억은 북한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미군과 남한 ‘괴뢰’ 정부를 물리친 중국 인민지원군의 용맹과 희생에 관한 것이었다. 그 기억 속 유일한 여성은 자원 예술단의 단원이었다. “영웅(남성 군인)을 노래하는” 그녀의 목소리와 이미지가 기억에 남아 있다. 남한과 북한 여성은 그 장면의 배경에서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서울을 여러 번 다녀 왔지만 관광 명소가 된 비무장지대에 가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거의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가 2018년 한겨울 겨우 성사된 회의에서 나는 비무장지대(DMZ)에 대해 뜻하지 않게 알게 되었다. 전쟁으로 분단된 남북한을 연결하려는 여성 활동가들의 여러 노력을 함께 나누기 위해 북미와 동아시아 여성들이 마련한 회의였다. 활동가들은 북한 여성들도 참석하는 회의를 베이징에서 개최하기를 바랐다. 북한 여성 3명이 회의가 끝나갈 무렵에야 도착해서, 오래 머물지도 않았고, 깊은 교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연설에 감정과 의견이 적당히 섞여 있었다는 것만 기억할 뿐 그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은 매우 단정한 옷차림에 섬세하지만 자연스러운 화장을 하고 있었다. 옷깃에 북한 지도자 배지를 달지 않았다면 서울에서 보는 사무직 여성들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번 파주에 오기 전까지는 전쟁과 여성의 연관성을 잘 몰랐는데, 우연히 본 조형물에 이끌려 들어간 박물관에서 10만 명 가까운 납북자 가운데 2%의 여성과 미확인 1%를 제외하고 대다수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해녀가 있는 휴양지로만 알고 있던 제주도에서는 흐린 어느 날 오후 지도를 보지 않고 언덕길을 내려오다 사슬에 묶인 채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가는 민간인 복장의 두 남녀 동상 앞에 설치된 거대한 기념비와 마주쳤다. 알고 보니 이곳은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평화 시기”로 불리는 시기에 가장 많은 인명이 희생된 비극이었던 제주 4.3 사건의 역사적 현장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공장으로, 전쟁 후에는 창고로 사용되다가 1948년 수용소가 된 곳이다. 여행을 준비하던 중 우연히 알게 된 제주 4.3은 막연하거나 완곡하게 표현된 단어들 때문에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파헤치기도 전에 옛 수용소이자 지금의 전시관에 도착했다. 제주 4.3 사건의 발단은 1948년 2월 유엔이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전쟁 후 일제 식민통치에서 해방되어 남북 통일을 고대하던 제주도민들은 남한의 단독 선거가 남북 분단을 기정사실화할 것을 우려했고, 전후 남한 통치를 맡은 미군정이 국가 재건의 비전을 마련하는 대신 과거 친일파에 의존한 채 제주도에 잔존한 친일파에 기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좌우 모두 참여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공무원과 민중이 모두 참여하는 총파업이 일어났다. 350명의 무장대를 거느린 남조선로동당은 12:7의 투표 결과로 무장봉기를 결정했다. 미군정은 봉기를 단호히 진압하기로 결정했고, 국내 극우 세력이 가세하며 가혹한 진압이 이루어졌다.
제주4.3평화기념관ⓒ염운옥_제주_2014 나는 며칠 후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 4.3 평화공원을 방문하여, 상세한 전시와 안내 책자를 보았다. 그에 따르면, 주민들은 무차별적인 진압을 피해 한라산에 올라갔다가 군의 투항 권유와 목숨을 뺏지 않겠다는 약속을 믿고 산을 내려왔다. 그런 주민 8천여 명 중 51%가 여성이었다. 그러나 군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무장하지 않은 주민 수천 명이 수감되었고, 수감 후 출산한 임산부까지 포함하여 수많은 남녀와 어린이가 제주도의 창고에 갇혔다. 그렇게 하여 군사재판에 회부된 사람 중 2,500명 이상이 적법한 절차 없이 판결문도 없는 사형, 종신형, 15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으로 약 3만 명이 사망했으며, 이 중 21%가 여성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정치적 낙인과 사망자에 대한 낙인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속적인 진상 규명 요구, 대통령의 거듭된 사과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국가 배상, 희생자와 ‘국가 영웅’ 모두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피해자 유족과 경찰의 화해 덕분에 사람들은 그곳을 재차 방문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우려 한다. 나 또한 피해자 가운데 여성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어졌다.
광주는 세 번째 방문지였다. 나는 1980년 항쟁으로 광주를 알고 있었는데, 나에게 이 도시는 항쟁이라기보다는 ‘항쟁의 기념’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관영 언론이 중국인의 유일한 미디어 채널이었고, 북한과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광주 여행의 가장 큰 소득은 광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의 헌신에 대해 알게 되고, 그들의 공로가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전남대학교에서 제작한 가이드북 『오월에는 광주로 가자』의 ‘관광’ 코스 하나는 여성들에게 할애되어 있었다. 그 코스의 첫 번째 방문지는 당시 광주의 유일한 여성단체였던 ‘송백회’를 중심으로 여성들이 어떻게 활동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루트였다. 당시 광주 여성들은 힘을 모아 화염병을 만들고, 『투사회보』를 발간하고, 시위에 참여하고, 희생자들을 위해 요리를 하고, 수의를 준비했다. 이 코스에서는 YWCA, 5·18민주광장, 전남도청, 5월 여성의 집, 조아라 기념관, 양동시장, 100여 명의 여성이 수감됐던 옛 교도소 등 총 16곳을 방문한다. 방문한 곳에는 진압 이후 여학생과 주부들의 일기가 역사적 기록의 일부가 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광주 거리를 걷다 보니 그분들이 살아 숨 쉬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군부 독재에 맞서 결성한 ‘5월 여성의 집’이 하필 그날 휴관이어서 아쉬운 점도 있었다. 모든 전시가 훌륭했지만 웹사이트에 공개된 정보가 부족하고, 영어로 된 정보가 많지 않았던 점도 아쉬웠다. 컴퓨터에서 한글 이름을 번역했을 때 해당 이름을 찾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참여자이자 지도자로서 여성의 역할이 광주에서부터 어느 정도 인정되고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광주 항쟁 이후 전두환 정권은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1983년 진보적인 여성단체들이 조직되어 공개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 여성단체들은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에 초점을 맞추고, 성폭력에 관심을 가지며, 문화와 의식의 변화를 위해 노력했다. 이들의 활동은 한국의 민주화, 인권 운동의 유기적이고 독특한 한 부분이 되어 평화적 투쟁이든 비극적 투쟁이든 점차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게 되었다. 한국의 페미니스트 친구들이 보기에는 기대에 한참 못 미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국은 1990년대 이후 민주화와 성평등이라는 상대적 동시성에서 엄청난 진전을 이루었다.
밀양은 서울을 벗어난 마지막 목적지였다. 10년 전 그곳에서 벌어진 ‘밀양 할매 투쟁’은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유일한 한국 사회운동이었다. 당시 <중국글로컬포인트 NGA China GP> 구성원 중 한 명으로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NGA> 활동에 참여하면서 베이징에서 밀양 할매 투쟁에 대해 알게 되었고 연대의 마음을 전했다.
당시 공기업인 한국전력공사는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가장 규모 있는 송전선로를 완공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고, 일부 마을의 농민들은 송전탑이 야기할 건강상의 위험과 기타 안전 문제, 송전선으로 인한 토지 가치 하락, 농업인 대출, 헐값에 이루어질 강제 토지 수용, 조상 묘에 미칠 영향 등을 우려하며 송전탑 건설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고 들었다. 칠십, 팔십 나이의 할머니들이 가장 결연하게 저항했고, 송전탑 건설을 위해 전력 회사가 개간한 언덕 위에 작은 천막을 치고 2년 동안 돌아가며 잠을 잤다. 밀양 할머니들을 응원하고 한국의 핵발전소 장비 수출에 반대하며 지구와 인류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전국 각지의 활동가들이 ‘희망버스’를 타고 마을로 몰려들었다. 2014년 시위에서는 70~80세의 할머니들이 알몸으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2004년 6월 11일 대치 당시 마을 입구에 140명, 시위 현장에 129명이 모였고, 정부는 시위를 막기 위해 경찰 2,000여 명과 공무원 100여 명을 파견하고 중장비를 동원해 집회 장소를 정리했다.
2024년 다시 타는 밀양 희망버스ⓒ환경운동연합(https://kfem.or.kr) 2024년 6월 8일 일요일 밀양 시위 10주년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 수백 명이 폭우 속에서도 희망버스를 타고 다시 이곳을 찾았다. 그중 몇 명과 함께 115호 송전탑 아래 집회에 갔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밀양 할머니’였다. 할머니들의 소박한 모습에서 거대한 행위주체성이 느껴졌다. 이어 밀양 시내 강변에서 전국 40~50개 단체가 공동으로 기념행사를 주최했다. 이 행사에서 연설과 다양한 공연이 번갈아 가며 진행되었고, 연사의 절반 이상이 지역 대표를 맡은 여성들이어서 환경보호와 한국 사회운동 전반에서 여성의 역할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집회에 참여한 어르신들의 춤을 따라 하는 초등학생들의 모습에서 민중 행동 정신의 계승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관객들이 북소리에 맞춰 자유롭게 춤을 추며 정의와 기본적 인권을 추구하는 것이 어렵고 비극적일 수도 있지만 즐겁고 유쾌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파주, 제주, 광주, 밀양에 이르기까지 나는 한국 민주화의 길에서 보이지 않았던 피해자 가운데 숫자와 비율로 구체화된 피해자, 구체적인 기록을 남긴 참여자이자 지도자, 운동의 주체이자 상징이자 주체로서 여성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네 가지 이정표를 목격했다. 한국의 성평등과 여성 인권은 여전히 새롭고도 오래된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나와 동료들은 한국의 여성 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경험을 통해 배우고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주’는 어쩌다가 ‘안보’의 문제가 되었나 (0) 2025.02.27 패전 직후 일본의 ‘낙태지시’와 여성들의 ‘임신중지’ 사이의 정치적 틈새 (0) 2024.08.28 한국과 네덜란드의 난민 수용 체계는 어떻게 다른가? (0) 2024.02.28 협소한 세계와의 싸움을 위하여 (0) 2024.02.28 이란 여성들의 목소리 (Iranian Women Speak Up) (0) 2023.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