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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소한 세계와의 싸움을 위하여칼럼 2024. 2. 28. 03:26
명길
도미야마 이치로는 「전후 일본의 오키나와론, 그 곤란과 ‘시작의 앎’」 에서 폭력 안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폭력이 상주하는 공간의 역사성을 지닌 오키나와가 사회운동의 지형 안에서 어떻게 ‘다르게’ 존재하는지를 따라가는 글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지역성 안에 존재해 온 삶의 맥락을 그 밖에서 재구성하는 관점들의 문제에 대해 뼈저리게 짚어낸다. 그는 한 챕터를 폭력에 관해 쓰는 것으로 할애하고 있다. 2004년 후텐마 기지 미군 헬기 추락 사건을 기점으로 오키나와의 사람들은 1959년의 헬기 추락 사건까지 함께 떠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폭력에 노출되어 온 사람들은 항상 하늘을 쳐다보며, 혹시나 헬기가 떨어지지는 않을지 조심하며 머리를 감싸는 생활을 이어나가게 된다. 2004년의 사건 이후 후생성은 이러한 사람들의 반응을 전쟁신경증이라 부르고 PTSD로 판단하여 치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증상을 치료하는 일은 일상의 구조 자체가 폭력을 동반하고 있는 현실 자체를 바꾸지 못한다. 도미야마는 이를 “식민지주의 속에서 상처 입은 자를 치료한 다음 식민지주의의 일상으로 돌려보내는 것과도 관계된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군사력은 무기도 기지도 아니다. 폭력에 노출되고 있다는 감각인 것이다. 그 지점에서는 지금 당장 폭력에 노출되고 있다는 것이, 이미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느낌과 지금부터 등장할 폭력에 대한 태세에 겹쳐져 있다. 과거와 미래는 그렇게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감각 속에서 현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감각 안에서 구성되는 ‘폭력’과 ‘평화’는 군사주의 밖의 삶이 상상해 구성한 개념들과는 다른 맥락을 가진다. 즉, 실질적 감각의 뿌리가 없는 개념들과는 상이하다는 것이다. 또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감각이 과거, 미래 그리고 현재를 구성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여 역사의 감각이 이 지역에서는 달리 구성된다는 의미이다.
또한, 메도루마의 희망을 두고 -도쿄나 오사카의 사회 운동 진영에서- 보인 반응들은 줄곧 ‘폭력은 결코 안 된다는 것’, ‘테러는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도미야마는 분석한다. 이러한 반응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현실을 아는 자들에게 서린 신체성을 단지 병적인 증상으로 간주하는 것과 동일한 시선에 불과함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 ‘테러에도, 전쟁에도 반대한다’와 같은 입장은 2024년 현재에도 이스라엘이 저지르고 있는 제노사이드에 대한 미온적이고도 뻔뻔한 수사와도 닮아있다. 2001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그 시기 ‘테러와의 전쟁’이 담고 있는 자유주의적 세계의 구상은 그들의 설정한 층위의 ‘폭력’을 다루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도미야마의 분석에 따르면, 이 또한 ‘폭력은 결코 안된다’는 일반적 규범이 자신들의 세계에 정당한 전제가 되어 있다고 믿는 자들의 오만이라는 것이다.
베를린 자유대 캠퍼스 여자 화장실 맨 오른쪽 칸 벽면에는 볼펜으로 쓰여 진행 중인 토론이 존재한다. 낙서처럼 이어지고 있는 그 익명의 토론에는 독일이 결코 제노사이드라는 폭력의 본질을 이해하거나 참회한 적이 없음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이스라엘이 자행하고 있는 제노사이드에 대한 ‘순진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을 언급하기보다는 ‘하마스’와 ‘테러’라는 어휘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때때로, 가자지구에 폭탄을 터뜨리는 것만큼이나 테러, 납치 행위는 나쁜 것이기에 자신은 (하마스의) 테러에도, (모호한 주어의) 전쟁에도 반대한다고 말한다.
이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무력의 불균형에서 주어를 일부러 흐릿하게 지운 전쟁이라는 단어는, 폭력은 나쁜 것이라는 일반적 진술 하에 소환되는 것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제노사이드는 작년 가을에서야 새롭게 시작된 것이 아니다. 2023년 하마스의 행위가 제노사이드의 방아쇠를 당긴 계기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난 역사 속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 자행해 온 정착 식민주의와 폭력을 지우며,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유대인에게 끼친 ‘폭력’적 행위에만 방점을 두는 행위이다. 한순간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뒤바꾸며 피해의 모든 원인을 전가하는 것이다.
베를린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신명길_2023 1948년 나크바를 시작으로, 이스라엘의 정착 식민주의는 팔레스타인으로 하여금 폭력 안에 살아오게 만들었다. 문화적 제노사이드에서부터 물자를 끊어 고립시킨 뒤 폭격하고, 조준 사격하여 ‘불구화’하는 등 다양한 층위의 폭력이 가자 지구를 중심으로 팔레스타인인에게 자행되어 왔다. 피난민 캠프나 병원마저 폭격당하는 도시 안의 생을 향해, “폭력은 모두 나빠”라고 소리치는 독일인들의 위선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서구 자유주의의 신화에 매몰된 폭력적 구조의 재생산이다. 독일인들이 제노사이드를 부정하는 이 순간에도, 가자지구는 폭격당하고 있으며 베를린에서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이들을 경찰은 인종 차별적으로 골라내어 연행해간다. 떨어지는 포탄 아래에서, 경찰의 인종 차별적 프로파일링의 전선에서 ‘폭력은 나쁜 것’이라는 말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화장실 칸막이에서조차 교조적인 태도를 떳떳하게 내보이는 저러한 일반론적인 문장들은 의미도 힘도, 맥락도 지운 언어일 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수사이다. 동시에 억압받고 있는 이들이 자신의 상황을 타개하고자 응집하는 행위 자체를 저지하고자 하는 전략적인 언동이다.
조지 플로이드가 미국 경찰의 인종차별적인 폭력에 의해 희생당하자 벌어진 ‘BLM (Black Lives Matter,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운동을 두고 ‘All Lives Matter (모두의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슬로건을 만들어낸 백인 중심의 미국 사회의 상황에서도 비슷한 점이 보인다. 억압받는 이들의 발버둥 앞에서 모두의 삶은 소중하고 모든 폭력은 나쁘다고 말할 때, 현실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생명과 그들이 당하는 폭력은 모조리 지워진다. 따라서 이는 단순한 무지가 아닌 적극적으로 폭력의 공모에 가담하는 수사이다.
한편, 도미야마는 앞서 오키나와를 이야기하는 일의 곤란함에 대해 구체화하기를, 오키나와인들의 맥락이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생이라는 것에 있다고, 하지만 폭력의 흔적은 개개인의 삶과 신체성에 입각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집합적 속성에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고도 설명한다. 그렇다면 폭력에 대응하는 집합적 속성으로서의 지역 단위는 어떤 고유함을 가지는 것일까?
문득, 나는 역사적 ‘신경증’을 앓고 있는 또 다른 지역을 알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광주. 세대가 갈수록 희석되어 가는 ‘기억’과 구전의 역사 속에서 이 도시에는 여전히 세대적 PTSD가 떠돌고 있지는 않은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러한 전세대적 긴장감을 고등학교에 다닐 때 처음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직접 겪지 않은 세대조차도 역사적 상흔을 품은 채로 폭력을 되새김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사 수업 시간에 몇몇 농민운동이나 봉기를 교과서에 적힌 단어 그대로 ‘폭동’이라고 부르는 걸 꺼렸다. 머뭇거리던 교실의 공기를 아직도 기억한다. 먼 시간과 공간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호명에서조차도, 그것은 우리가 입 밖으로 꺼내기에 두려운 언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를 계속 신경 쓰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그것이 적확한 호명일지라도, 우리 도시와는 무관하게 동떨어진 이야기를 향해 부를지라도 우리에겐 차마 그 자체로 무서운 단어였다. 폭동과 폭도 등과 같은 언어들이 말이다.
5월 20일 광주 금남로 상공을 계엄군의 헬기가 날고 있다ⓒ김해운 한국일보 기자_1980 나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오월 광주와 폭력의 관계를 소명해야만 국가적 차원의 역사화를 꾀할 수 있었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졌던 부정과 혐오를 반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민군이 왜 총을 들어야 했는가, 그러니까 우리의 대항 폭력은 왜 필요했는지를 정당화해야 했던 국가적 역사화의 과정이 있었다. 또한, 광주를 비롯하여 호남에 대한 무차별적 혐오 발언이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밈’이자 정치적 전략이 되면서, 우리는 ‘폭도가 아니’라고 해명해야 한다는 압박에 늘 시달렸다. 시민군 조직이 왜 정당했는지, 공수부대의 폭력이 얼마나 잔인했기에 우리가 우리의 조직을 꾸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계속해서 해명해야 한다는 세대적 감각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폭력’이라는 이름의 유령에게 계속해서 쫓기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단순하게도,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는 말은 오월 광주의 절박했던 상황 앞에서는 유명무실해졌을 것이며, 그저 현실을 모르는 오만이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이것이 세대적인 감각이며, 그 세대적인 감각은 곧 달리 말하여 지역의 역사성이란 것을 구체적으로 깨닫게 되었던 날이 있었다. 어느날, 내가 학교의 특정 행사에 반대하여 다른 반을 돌아다니며 건의문을 읽고 연서명을 받으려 했었다. 한 반의 반장이었던 친구가 나를 불러내더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부정적인 심정을 에둘러 표현했다. 그의 말의 요지는 ‘선동하지 말아달라’는 것 정도로 요약할 수 있었는데, 나와 다른 입장과 의견을 가진 친구였음에도 그가 ‘선동’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꺼리고 있음을 나는 당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와 그 친구 모두 그 단어의 존재감을 느끼고 있음에도, 그리고 그 단어를 사용할 만한 상황에서도 차마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채로 씁쓸하게 돌아섰다.
히가 토요미츠_ 오키나와 전군노 투쟁_1971 ⓒ제주의소리 우리는 어떤 언어는 아예 사용하지 않은 채, 어쩌면 영영 잃은 채 학창 시절을 보냈다. 어떤 단어들은 입에 담기만 해도 끔찍해지는 기분이 들었고, 우리 세대는 직접 경험 없이 이 도시에서 살아내고 체득한 기억들로 키워진 아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언제나 또 언제나, 단어를 신경 쓰고 다듬고, 또 너무 과격한 언사는 아닌지 돌아보며, 우리가 내뱉은 ‘폭동’이나 ‘선동’ 같은 단어들이, 그동안 우리를 겨눠왔던 문장의 힘으로 우리와 맞부닥쳐오는 것을 느낀다. 폭력적이거나 과격한, 혹은 정치적이거나 ‘빨갱이스러운’ 단어는 맥락과 무관하게 그저 꺼내기조차 무서운 언어가 되어왔기 때문이다.
가해의 언어가 우리를 상처입혀온 기억이 너무 길기 때문에, 그저 평범히 부유하는 단어 자체를 두려워하기에 이른 것이다. 폭력과 관련된 언어는 우리의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순간, 긴장을 유발하기 시작했다. 그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무섭게 했던 존재들과 압박감은 ‘우리’를 언제나 지나치게 폭력적이라고 비난 해왔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 동안 이렇듯 유령에게 쫓기는 기분은 멈추지 않았다.
부모로부터 5.18에 대한 기억을 공유받아 온 나의 세대는 그들의 집합적 기억을 다시 한번 재구성하여 품고 있다. 우리 (세대)는 어린 시절 ‘우리(광주)’가 당했던 폭력을 언제나 직접적으로 체감해 왔는데, 그 시절 속에서 광주의 초중등생들은 5.18 당시의 시신 사진을 모자이크 없이 응시해야 했던 것이 당연했고, 전남도청 계단 밑에 쓰러져있는 시신 영상을 매년 봤으며 금남로에서 시민들이 곤봉에 맞고 피를 흘리며 진압당하는 영상을 눈에 새기듯 자주 봤다. 우리 아버지는 한때 초등학생인 나에게도 서슴없이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했었는데, 그 내용은 ‘전두환의 모가지를 썰어다, 아니 심장을 도려다가 전남 도청 앞 분수대 꼭대기에 거는 것’이었다. 그 소원 안에 담긴 분노, 그리고 내가 이미 이 지역에서 나고 자라며 구성한 ‘나’의 안에서 싹트고 있는 부글거리는 분노. 그리고 이를 드러냈을 때 마주해야 할 반응에 대한 공포. 이 두 방향의 긴장 속에서 폭력은 유용한 개념이자 빌미로 작용해 왔다. 그렇기에 우리는 폭력에 반대하지만, 어떤 폭력적인 재현은 우리에게 대수롭지 않은 동시에, 우리가 때로는 스스로 폭력적이길 자처해야만 자유로워진다.
5월 24일 광주 전남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의 집회ⓒ한국일보_1980 달리 말하여, 폭력의 경험 아래 억압받는 이들은 언제나 투쟁해 왔다. 폭력 없는 투쟁은 없기 때문이다. 제도에 대한 두려움과 화, 동시에 떳떳함이 엉켜 생겨난 감정은 때때로 매우 격했고, 어떤 날에는 두려움 속에 숨겨져 있기도 했다. 그것은 폭력이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세대적 반응이기도 하다. 즉, 유령에게 쫓기면서도 꿈틀거리는 저항의 박동들은 불발될지라도 해소되진 않았기에 끊임없이 억압의 고리를 끊고자 내달리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분노’의 모양새는 억압의 기제를 꿰뚫을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에, 지나치게 사납거나 폭력적이라는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이 헤게모니의 도식은 세계의 여러 시간과 공간에서 활용되고 있음을 다시금 알 수 있다. 오키나와, 팔레스타인, 광주와 미국의 흑인 커뮤니티를 꿰뚫는 정동은 ‘폭력’을 둘러싼 다층의 레이어인 것이다.
프란츠 파농은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말한다. 피식민지인들이 품고 사는 것에 대해서. 그는 무릇 식민지인이라면 가슴 안에 품고 있는 것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피식민자는 처음부터 폭력을 준비해 왔다. 금기투성이인 자신의 협소한 세계에 싸움을 걸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폭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들은 태어나자마자 깨닫는다…. 식민 세계의 질서를 통치하는 폭력은 … 직접 역사를 실현하기로 한 피식민자들이 금지된 도시들로 떼 지어 쳐들어갈 때 죄를 씻을 것이요 합당한 수단이 될 것이다.”
가슴에 쌓인 것에 이름을 어떻게 붙이든, 존재론적으로 저항 그 자체인 감정들이 억압받는 이들에겐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 위에서 폭력에 대한 이야기는 집합적으로 구성된다. 어떤 순간에는 반폭력이고 어떤 순간에는 대항 폭력이며 그리고 어떤 순간에는 폭력 안에서 자라온 폭력적 충동이다.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는 단순한 슬로건의 이면엔 사실은 억압받는 이들의 수단조차도 빼앗으려는 수사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 도식 안에서 평화는 이미 고정된 표상으로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어쩌면 ‘폭력’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필요로 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을까? 하나의 폭력이 아닌 다양한 층위의 다양한 폭력과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는 오히려 우회의 길 안에서 폭력의 피해자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며 투쟁의 원동력을 찾고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로서의 삶을 돌보게 만들어 줄 것이다. 계몽 신화에 취한 오만에서도 벗어나고, 서구 자유주의의 의도적 순진함을 걷어차고, 우리는 대항 폭력과 반폭력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가이자 문학가였던 가산 카나파니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 이런 내용이 있다. 아들이 자신이 팔레스타인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흐느껴 울자, 그에게 건네는 말이다. “옆방에서 네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더구나…. 사람은 자라는 것이 아니란다. 사람이 그렇게, 어느 날 단어 하나가 심장에 박혀서 다시 태어나는 거란다.” 억압받는 자들이 집합적으로 살아가며 체화하는 각자의 정동과 공동의 감각. 가슴에 콱 박혀 이미 한 몸이 되어버린 역사적 감정들은 ‘폭력’을 일축하지 않을 때, 보다 더 풍부한 직시를 통해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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