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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보호소폐지운동을 말하다: ‘폐지’라는 상상력, 없애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실천을 향하여이슈 2023. 8. 30. 12:27
아정(외국인보호소폐지를위한물결IW31)
예측불가능함 속에서 그러나 유연하게, 서로를 흔들고-서로에게 흔들리는 파동이 시작되다
격주로 화성외국인보호소에 면회를 가는 ‘마중’ 활동을 통해서 M을 만난 것은 2021년 늦은 봄이었다. 부당한 독방 구금과 ‘새우꺾기’라는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는 그의 말을 처음 들었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 CCTV 일부를 확보한 변호사들과 함께, 독방에 감금되어 묶인 채 몸부림치는 M의 모습을 확인했다. M이 전해준 말과 편지를 통해 ‘보호’를 빙자한 ‘구금’시설인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인권유린이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그것도 일상적으로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Fight with me!”. 나와 동료들을 만나게 하고 외국인보호소폐지운동을 촉발한 계기는 어쩌면 ‘도와달라’가 아닌, ‘함께 싸워달라’는 M의 한 마디가 아니었을까.
M이 보호소 ‘밖’으로 나왔을 때, 구금 트라우마로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 그의 일상을 하루씩 돌아가며 조력해 보자는 취지로, 이미 다른 현장에서 각자의 활동을 하고 있던 서른 한 명에게 편지를 썼다. M의 문제가 공론화되기 직전이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주저하면서도 기꺼이 마음을 내 준 이들이 모여 <외국인보호소 폐지를 위한 물결 International Waters31>(이하 IW31)이 꾸려졌다. IW31은 ‘공해(公海)’라는 뜻이다. 흐름과 파도 속에서 늘 흔들리며 아무도 소유할 수 없는 바다를 상상하며, 외국인보호소에서 유예되었던, 흐르지 않았던 시간들을 흐르는 시간으로, 동료들과 함께 바꿔내고 싶었다. 다양한 활동 경험이 있고, 각자 활동의 장(場)을 가진 이들의 목소리가 섞이면서, 운동은 처음의 의도나 기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울퉁불퉁하게 확장되어 나갔다. 예측불가능함 속에서, 그러나 유연하게. 서로를 흔들고-서로에게 흔들리는 IW31의 모험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탈시설’과 ‘보호소 폐지’라는 문제설정, ‘갇혀도 되는 존재는 없다’는 공통항으로 만나다
IW31 활동을 하기 전에는 난민신청자 혹은 미등록비국민을 조력한다는 것이 성소수자, HIV감염인, 전시성폭력 피해자, 가정폭력이나 데이트폭력 피해자, 학대당하는 어린이,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 약물사용자, 탈가정청소년, 정신장애인과 연결되는 활동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주’에만 중심을 두고 ‘난민신청자’나 ‘미등록비국민’을 '국경’이라는 발상에만 가두어 놓고 상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생활, 의료, 법률 조력을 하다 보니, 각자의 취약성을 난민 사유로 가진 이들이 국경을 넘으면서 자신의 취약성을 악화시키는 조건 속에 던져진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HIV감염인에 대한, 정신장애인에 대한, 약물사용자에 대한, 탈가정청소년에 대한, ‘~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계속되는 한, 국경을 넘어온 이들이 겪는 문제 역시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던 시간들이었다.
외국인보호소 폐지운동이 ‘탈시설’이라는 문제설정에 접속하게 된 것은 외국인보호소를 나와도 여전히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고민하게 되면서부터다. 외국인보호소에서 ‘보호일시해제’로 풀려 나도 미등록비국민들은 노동권, 이동권, 건강권, 주거권 등이 보장되지 않을 뿐더러, 출입국외국인청에 매달 출석하여 도망가지 않았다는 사실 뿐 아니라, 도망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입증해야 하는 상태, 즉 ‘추방-유예’의 상태에서 위태롭고 불안한 삶으로 내몰린다.
IW31은 난민신청자가 시설화된 한국사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공론장을 기획했다ⓒ왼쪽 웹자보_예주 ⓒ오른쪽 사진_상환 장애인 탈시설운동의 최전선에서 시설폐지를 이뤄낸 활동가들은 탈시설운동이 다름 아닌 ‘주거권운동’이라고 입모아 강조한다. 장애인들에게 시설을 나온다는 건 ‘집을 만드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M이 우여곡절 끝에 보호소를 나오게 되었을 때, 그를 조력하면서 제일 먼저 고민했던 것도 바로 ‘살 집’이었다. 미등록인 상태에서는 자기 이름으로 월세 계약을 할 수도, 통장을 만들거나 휴대폰을 개통할 수도 없다. M에겐 누군가의 이름을 빌려서만 살아낼 수 있는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M은 여러 공론장에서 “나는 ‘지붕 없는 감옥’에 살고 있다, 노동권을 보장하라”는 주장을 해왔다. 보호소 ‘밖’으로 나와도 감시와 통제, 여러 부당함이 이어진다는 것을 드러내는 중요한 말이다. 그런데, ‘노동권을 보장하라’는 M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이들에 대한 조력활동을 이어 나가면서 새로운 고민이 생겨났다. 바로 ‘노동권’ 너머의, 일할 수 없는/하지 않는 몸들을 만나면서부터다.
난민신청과 심사과정이 장기화되면서 노인성 인지장애가 생긴 난민신청자, HIV감염인이라는 이유로 보호소에서 오랜 격리구금으로 정신질환이 발병한 구금해제자,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일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이주배경 청소년들, 그 밖에도 신장 투석 등 장기적인 치료를 요하거나 C형 간염 등 값비싼 특허약으로만 치료가능한 질병을 가진 난민신청자들,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일터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이런 취급받으면서 더 이상 일 못하겠다’고 노동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노동을 할 수 없는/하지 않는 미등록비국민이 시설에 갇히거나 쫓겨나지 않고도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세상일까. 조력과정은 기존의 문제의식이 갱신되고 새로운 물음들에 끊임없이 도전 받는 과정이기도 했다.
‘탈시설’과 ‘폐지’운동은 탈시설 혹은 폐지 ‘이후’의 삶을 상상하고,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비국민’이 갇히지 않고도, ‘비장애인’의 안전을 위해서 ‘장애인’이 갇히지 않고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분투한다는 지점에서 공통항을 갖는다. 여기에는 장애인도 일하게 해달라, 미등록비국민도 일하게 해달라는 간청과 호소만으로는 그 삶을 오롯이 보장받을 수 없는 몸들이 있다는 것 또한 놓쳐서는 안 된다.
‘국민’과 ‘공공’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국가폭력
사회복지시설은 흔히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머무는 곳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이 말을, ‘자립’할 수 없으면 시설에서 나갈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게다가 ‘의존’함으로써만 가까스로 확보될 수 있는 ‘자립’의 과정 그 자체에 대한 상상력도 결여되어 있다. 어느새 장애인이 시설에 갇혀 사는 것을 이 사회는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전국에 있는 출입국관리청 혹은 외국인보호소와 같은 이주구금시설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이주구금’이란 이주 및 출입국을 통제하는 권한에 근거한 구금을 말한다. 국경을 넘은 비국민들이 체류기한을 넘기는 것이 위법한 행위라는 규정을 만들어 놓고, 이를 범죄화하여 ‘불법체류자’로 호명함으로써 누군가에게는 ‘재량’이라는 기괴한 권력이 생겨났다. 출입국 통제는 마땅히 행사되는 ‘국가 주권’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입법 및 집행단계에서 경찰과 공무원에게 ‘상당한 재량’이 인정되어 왔다. 이주구금의 영역에서 인권문제는 다름 아닌 ‘신체의 자유’와 ‘국가 주권의 재량’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경찰과 공무원의 재량은 사안에 따라 생살여탈권이 되고, ‘국민’ 혹은 ‘공공’의 안전을 위해 비국민에게 휘둘러지는 단속-구금-추방의 연쇄적인 국가폭력을, 대다수 국민들은 어느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신념체계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국경통제는 이미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는 것 아닐까.
‘무기한 구금’에 대한 헌법불합치 판결만으로는 외국인보호소폐지운동을 멈출 수 없다
‘무기한 구금’의 근거가 되어 온 출입국관리법 제63조 1항의 “송환할 수 있을 때까지 보호시설에서 보호할 수 있다”는 문구는 사실상 ‘보호’가 아닌 ‘구금’이냐 아니냐는 논의를 차치하고서라도, 무엇보다 송환 자체가 불가능한, 돌아갈 곳 없는 난민신청자들을 ‘기한없이’ 구금시설에 가두는 법적 토대로 기능해왔다. 이 조항은 기본적으로 누군가 이 사회에서 격리되어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전제 위에 군림한다. 악법이 유지되는 동안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무려 4년 8개월을 부당하게 갇혀 지내야 했던 이도 있었다. 출입국관리법 제63조 1항에 대한 세 번의 위헌 제청 끝에, 2023년 3월 23일, 헌법재판소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헌법재판소 2020헌가1, 2021헌가10 병합).
무기한 구금에 대한 헌법불합치 판결이 있던 날ⓒ상환_헌법재판소_2023 물론, 무기한 구금에 대한 헌법불합치 판결은 환영할 만한 성과다. 그러나 이러한 결실이 곧장 장기 구금자들의 즉각적인 보호해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또한 이번 판결만으로는 단속-구금-추방이라는, 가난한 국가에서 온 비국민을 향해 차등적으로 행사되는 합법화된 연쇄적 국가폭력을 끊어낼 수 없다. 위헌제청, 입법 그리고 법 개정운동이 이주구금 문제를 다룰 때 중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국경통제’라는 원초적인 국가 폭력 앞에서, 이를 사법적으로‘만’ 접근하는 것에 대해서는 위화감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헌재 결정 이후로도 법무부와 경찰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대적인 합동단속을 실시하여 일터뿐만 아니라 예배당, 콘서트장, 마트, 버스정류장과 같은 일상의 공간에서 비국민들을 잡아들였다. 비국민들의 일상은 이렇듯 ‘공공’의 이름으로, ‘국민’의 안전을 위해, 느닷없이 들이닥친 공권력에 의해 하루아침에 중단된다. 올해 상반기에만 3만 7천여 명이 강제출국 혹은 자진출국이라는 이름으로 ‘추방’당했다. “외국인보호소 지금-당장 폐지하라”는 목소리를 멈출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차성’을 활동의 장(場)으로, ‘버스 타고 찾아가는 외국인보호소폐지문화제’
지난 6월 23일, 무더위 속에서도 100여 명이 화성외국인보호소 앞에 모였다. IW31은 ‘버스 타고 찾아가는 외국인보호소폐지문화제’(이하, 버찾폐)를 기획하여, 버스를 빌려 연대자들과 함께 타고 갔다. 찾아오기 어렵도록 작정이라도 한 듯, 대중교통으로는 접근성이 떨어지는 외진 곳에 지어진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그것도 “지금-당장 폐지”를 외치며 모여든 것은 화성외국인보호소가 설립된 2000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버찾폐의 마지막은 캄캄밴드의 연주와 저마다의 구호로 가득했던 보호소 앞 행진으로 장식했다ⓒ상환_화성 외국인보호소 앞_2023 문화제 준비과정에서 IW31 동료들은 저상버스, 비건 도시락, 수어통역을 기본값으로 설정하여, ‘누구나 함께 갈 수 있다’는 문구가 슬로건으로만 그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기획에 담았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 이하루, 빌리카터, 캄캄밴드의 공연 틈틈이 다채로운 연대발언이 이어졌고, 장애, 퀴어, 동물해방과 외국인보호소폐지운동이 ‘구금’이라는 교차로에서 울퉁불퉁하게 연결되는 순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으라면, 참가자 모두가 수어로 “외국인보호소 폐지하라!”를 함께 외쳤을 때였다.
‘보호’의 실체가 ‘감금/구금’이라면, ‘보호’는 명백히 지배자의 언어이고, 더욱이 비장애인, 국민, 인간의 ‘안전’을 담보로 하는 장애인, 비국민, 비인간동물의 ‘감금’은 겹겹의 차별과 혐오를 노골적으로 양산하며 국가의 통치 기술로 작동한다는 것을, 땡볕 아래 ‘연결되려는 말들’ 속에서 절감했다.
버찾폐를 마치고 난 뒤 평가회의에서 IW31 동료들은 ‘내년’의 버찾폐를 기약하지 않았다. 봉투가면시위를 계속하지 않았던 마음과 일맥상통하게, 우리는 관성이 되기 쉬운 활동을 경계하면서, 그 무엇으로도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새로운 직접행동과 새로운 운동의 언어를 끊임없이 벼려내려는 공동의 의지를 힘겹게 붙들고 있다. 지속가능한 활동이란, 지금 하고 있는 활동을 앞으로도 계속하려는 관성에 기반한 바람과는 달리, 하고 싶은 활동을 위한 조건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으로부터 가까스로 확보되는 것 아닐까. 임계를 갱신하면서도 지속가능한 활동을 위해 활동가들이 소진되거나 착취되지 않으려면 어떤 환경이 필요할까. 그러한 활동의 조건들은 어떻게 확보 가능한가. IW31의 구성원들은 여전이 여러 물음들 속에 함께 서 있다.
“그래서, 대안은 뭔데?”라는 물음 앞에서
외국인보호소 폐지를 주장할 때마다 “그래서, 대안은 뭔데?”라는 공격적인 물음을 마주하곤 한다. 이 때마다 상기하는 문구는 미셸 푸코가 1976년 몬트리올 대학에서 ‘구금형의 대체 방안’이라는 강연을 했을 때 언급했던 한 구절이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감옥의 대안이라는 것은 결국 지금까지 감옥 ‘내부’에서 이루어졌던 기능을 감옥 ‘밖’으로 자유롭게 해방하고, 그에 따라 통제, 감시, 정상화, 재사회화 같은 여러 절차가 이 기능을 다시 수행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보호소 ‘밖’으로 나온다 하더라도 보호소 ‘안’에서 작동했던 감시와 통제라는 ‘통치’의 기술들이 형태를 달리하여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조력 활동을 통해 알아차리게 되면서, 푸코가 ‘감옥정보그룹’(Group of Information on Prison, GIP)을 창설하고 수감자들의 이야기를 감옥 밖으로 전하는 운동을 하면서도 왜 ‘감옥 폐지’라는 카드를 쉽사리 꺼내 들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리적인 구금시설이 폐쇄된다 한들, 이 사회 내에서 작동하는 합법화된 국가폭력은 다른 모양새로 사회구성원 사이를 이간질하고, 분리하고, 통제할 것이라는 50년 전 푸고의 경고는 지금-여기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참조점이 된다.
‘폐지’라는 상상력은 종종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이상’으로 치부된다. 사법적 해결과 정책을 논하는 공론장은 ‘폐지론자’를 달가와 하지 않는다. 언제나 ‘현실적 대안이 아니’라는 단정과 함께 본격적인 논쟁에서 배제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외국인보호소 폐지운동과 면회활동을 병행하다 보니, 시설폐지를 주장하면서도 시설 ‘안’에 있는 이들의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분열증적인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시설 ‘밖’에 대한 상상력은 곧잘 시설 ‘안’의 당장의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에 번번이 잠식당하고 만다. 시설이나 처우의 ‘개선’이 아닌,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온건한’ 구금, ‘허용가능한’ 구금, ‘효과적인’ 구금 따위를 더이상 구상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M이외에도 여러 난민신청자와 보호일시해제된 이들을 보호소 ‘밖’에서 조력하는 과정에서, IW31활동가들에게 예상치 못했던 분투가 시작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돌봄투쟁’이다. ‘조력’이라는 말로 담아내기엔 너무나 치열한 시간들이었다. ‘서로-돌봄’이라는 말을 꺼낼 수 없을 만큼 일방향적인 돌봄을 해야 했던 과정, 한 명의 온전한 삶을 위해 수십 명이 달라붙어도 모자란다는 현실에 대한 감각의 각성은 조력대상자와 활동가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외국인보호소폐지문화제 참가자들이 각자의 손피켓을 만들고 있다 ⓒ상환_화성 외국인보호소 앞_2023 만나고, 갈등하고, 실패하고, 도전 받는 모든 시간이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였다. 이는 당사자의 고유성 혹은 본연의 모습을 존중하는 문제이기도 하고, ‘피해’의 폭로에 그치거나 피해자-조력자 관계의 전형성에 머무르지 않는 새로운 관계성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다. 외국인보호소의 구금에서 풀려난 비국민들의 탈출 서사 ‘이후’에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순탄치만은 않은 새로운 관계적 삶과 기존의 지배적인 담론에 근거하지 않는 실천이 아닐까.
“우리의 운동은 ‘구금의 대안’을 찾자는 것이지, ‘대안적 구금’을 모색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동료 림보의 말은 푸코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IW31의 구성원들에게 ‘몸소’ 알아차릴 수 있는 감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시설이나 처우의 개선이 아니라, 아무도 가두지 않는 방식으로 체류기한이 지난 비국민이 이 사회에서 사회구성원으로 당당하게,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말처럼 쉽지 않은 ‘함께’라는 삶의 방식, ‘돌봄투쟁’에 대한 사회적 고민, 국가에 대한 ‘돌봄이 가능한 시스템’의 요구, 비국민을 가두거나 감시/통제하지 않고 경제활동이 보장되는 생활형 숙소, 노동할 수 없는/하지 않는 몸들도 함께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모색, 무엇보다 ‘탈사법화’, ‘재정치화’된 ‘폐지’라는 상상력이 시급하게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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