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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난민이슈 2022. 9. 1. 00:08
고가영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2022년 2월 24일 국내외 대부분의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러시아 군대는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었다. 수도 키이우, 서부 르비우, 동부 하르키우, 남부 오데사 등 우크라이나 전역의 대도시에 폭격이 행해졌다. 러시아는 이 명백한 침략전쟁을 ‘특별 군사 작전’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동부 지역에서 위협받고 있는 자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작전이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전쟁 발발 다음날인 2월 25일에 키이우에 살고 있는 지인인 비탈리 팀치쉰(물리학자, 우크라이나인)에게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지하에 대피 중이고 폭발음과 싸이렌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고 그가 전하는 소식을 들으며 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전쟁의 참상들이 보도되는 것을 보며,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취임 연설이 떠올랐다. 그는 희극인답게 “나는 평생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웃도록 노력했습니다. 앞으로 5년도 여러분이 울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것을 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젤렌스키는 가장 자국민을 아프게 한 대통령이 되었다. 전시에 도망치지 않는 용맹한 대통령이 될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이 전쟁을 막았어야만 했다.
전쟁 전후 ⓒ 안 엘레나_우크라이나_2022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서구의 전폭적인 무기 지원과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이미 6개월을 넘어가고 있다. 더구나 지난 6월 29일 푸틴 대통령이 ‘이번 전쟁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전쟁의 피해 규모는 지속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여겨진다.
전쟁의 원인이 나토의 동진이든,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재편하고자 한 러시아의 열망이었든, 우크라이나 내부의 동·서 갈등이든, 전쟁으로 고통받는 것은 미국과 러시아의 통치자들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전쟁의 참상 속에서 수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자신들의 집과 일터를 떠나 국경을 넘고 있다. 전쟁 난민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3월 8일에 약 200만 명이었던 난민이, 3월 12일에 약 250만 명, 3월 15일에 300만 명, 3월 30일에 400만 명으로 증가했다. 유엔 난민 기구(UNHCR)의 8월 9일자 통계에 의하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은 난민은 10,623,91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들 난민들이 가장 많이 간 곳은 폴란드(약 527만 명)와 헝가리(약 114만 명)이다.
그런데 인상적인 점은 러시아로 들어간 난민들이 약 197만 명에 달한다는 점이다. 러시아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인도주의적인 대피로를 러시아로 열어준다든지, 러시아 국적을 소지한 사람들은 유럽으로 갈 수 없고 러시아로만 가야한다는 점들이 반영된 결과이다. 이 외에도 루마니아(약 100만 명), 슬로바키아(약 67만 명), 몰도바(약 57만 명), 체코(약 41만 명)로 다수의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들어갔다. 독일로는 94만 명, 영국으로는 11만 2천 명, 프랑스로는 9만 7천 명의 난민들이 유입되었다,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시리아 난민과 비교하여 인근 국가들로부터 환대를 받고 있다. OECD 대표부의 5월 23일 보고서에 의하면, 우크라이나 난민들 중 성인의 80-90%가 여성이며, 난민의 절반 정도는 미성년자들이다. 이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18세-60세의 전투 가능한 남성들의 출국을 막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다른 난민들과 비교할 때 고등교육 이수자가 많은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인근국가들에서 우크라이나 난민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일례로 폴란드는 시리아 난민은 수용을 거부했으나,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한편 이들 난민들 중 타지에 지인들이 있는 경우 그리로 거처를 정하지만, 타국에 연고가 없는 경우 인근 국가들의 난민 수용소에 체류하고 있다. 그런데 폴란드 난민 수용소에 2주 이상 체류했던 안 엘레나의 증언에 따르면, 난민 수용소의 거주 조건들은 매우 열악하다. 이러한 이유로 약 천만 명의 난민들 중 우크라이나로 다시 돌아가는 이들이 약 4백 5십만 명에 이른다.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 고려인의 한국 유입
이처럼 대규모로 난민이 발생하는 상황 속에서, 일부 우크라이나 고려인 난민들이 국내로 들어오고 있다. 고려인은 2013년 우크라이나 사태 이전에는 약 3만 명가량의 고려인이 우크라이나에 거주했다. 2022년 전쟁 발발 당시 우크라이나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들은 약 12,000명으로 집계되었고, 실제로는 약 2만 명 정도가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인들이 우크라이나에 거주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고려인들은 19세기 후반부터 주로 한반도 북부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이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자, 정치적인 이유로도 조선인-이주민(스스로 고려 사람이라고 부름)들이 연해주로 유입되었다. 이후 볼셰비키 혁명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레닌 사후 집권한 스탈린 통치 시기인 1937년에 중앙정부는 강제이주 정책을 시행했다. 그 결과 약 17만 명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중앙아시아에서 거주이전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은 유형민족으로서 살았던 고려인들은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거주이전의 자유를 갖게 되었다. 이후 흐루쇼프 통치 시기 일부 고려인들이 우크라이나로 계절농업(고본지)을 다녔으며, 이를 계기로 우크라이나에 고려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한반도를 떠나 연해주로,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중앙아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이주했던 고려인들이 이제 전쟁 난민이 되어 다시 한반도로 귀환하고 있다. 한국은 1992년에 난민 협약을 체결했으며, 2012년 난민법을 제정함으로써,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2015년 유엔난민기구가 발표한 글로벌 동향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국내 총생산 대비 난민보호 수용력은 189개 국가 중 119위이다. 난민 인정률도 2016년에 0.8%, 2017년에 1.51%에 불과하며, 난민 문제를 사회적으로 대두시킨 예멘 난민의 경우 난민 인정을 받은 사람은 단 2명에 불과하다.
전쟁 난민이 된 이들 고려인들에게도 한국 정부는 난민 비자를 부여하지 않고, 재외 동포 취업 비자(H-2 혹은 F-4)를 발급하고 있다. 이로써 난민 협약에 따른 난민 지원의 의무를 행하지 않을 수 있다. 정부는 이들을 전쟁 난민이라기보다 취업을 위해 들어온 재외 동포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난민 인정을 받을 경우 90일을 국내에서 체류할 수 있지만, 재외 동포 취업비자를 받는 경우 3년을 체류하고, 이후 연장할 수 있기 때문에 비록 초기 정착을 위한 지원을 정부로부터 전혀 받을 수 없다 하더라고 체류의 안정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이를 선호하는 고려인들도 있다.
광주 고려인 마을과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 고려인
정부 차원의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에 대한 지원이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고려인 전쟁 난민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들이 있다. 우크라이나 난민들의 국내 유입을 돕는 주체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 2동에 위치한 사단법인 고려인 마을이다. 고려인 마을은 우크라이나 난민 수용소에서 도움을 요청한 고려인들의 국내 입국 항공권을 구입하여 보내고 있다. 지난 2월 말 전쟁 발발 이후부터 8월 2일까지 국내 입국한 고려인 난민 수는 120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 중 고려인 마을의 항공권 지원으로 국내 입국한 고려인은 570명이며, 이들 중 광주에 정착한 이들은 420명에 달한다. 나머지는 안산, 인천 등 연고자가 있는 지역으로 떠났다.
광주 고려인 지원 센터 ⓒ고가영_2022 광주 고려인 마을은 2002년부터 고려인 이주 노동자들을 돕는 일을 시작하여, 고려인들의 초기 정착과 일자리 알선 등을 담당한 <고려인 지원 센터>, 중도 입국 자녀를 위한 대안학교인 <새날학교>, <어린이집>, <바람개비 지역아동센터>, <고려인 교회>, <쉼터> 등의 고려인들을 돕는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다. 이에 더하여 고려인 마을은 고려인 박물관과 정부의 인가를 받은 고려인 방송국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지금은 우크라이나 난민 고려인들의 정착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가구당 보증금 2백만 원, 두 달치 방세 80만원, 생계비 백만 원을 지원하고 있다. 아울러 매주 생필품들을 무상으로 나누어주기도 한다. 이 모든 비용은 후원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고려인 마을의 지원으로 입국한 난민들 중에는 우크라이나인 아내와 18개월된 딸과 함께 입국한 1988년생의 김씨도 있다. 김씨의 경우는 8세에 부모님과 함께 우크라이나로 이주했으나, 무국적자로 살아왔다. 젊은 남성들의 경우는 출국이 금지되어 있지만, 무국적자이기에 우크라이나 정부의 동원령에 해당되지 않아 출국할 수 있었다. 무국적자로 제약 속에 살아왔으나,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 무국적자들은 일생 거주 지역을 벗어날 꿈도 꾸지 못하다가 오히려 전쟁으로 인해 한국으로 입국이 가능해진 것을 다행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렇지만 무국적자들의 대부분은 우크라이나 인근 국가 주재 한국 대사관이 발행한 여행증명서로 국내 입국 후 임시비자인 G-1 비자를 받아 거주하고 있다. 이로 인해 취업 제한과 6개월 단위로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불편을 겪고 있다. 현재 무국적자인 고려인은 약 60여 명이다.
광주 고려인 마을에서 만났던 우크라이나 난민 고려인 중에는 한국에서 6년 동안 공장에서 일했던 1979년생인 안 엘레나씨도 있다. 엘레나는 6년 동안 공장에서 힘겹게 번 돈을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에 살고 있는 부모님과 청각장애인인 딸에게 송금해왔다. 엘레나는 지난 1월 가족들을 만나러 우크라이나로 들어갔다가 전쟁을 겪게 되었다. 그녀가 송금한 돈으로 마련한 예쁜 집은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 그녀는 적십자의 도움으로 버스를 타고 몰도바-루마니아-헝가리-슬로바키아를 거쳐 폴란드 난민 수용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고려인 마을에서 보내준 항공편으로 가족들과 함께 입국했다. 6년 동안 공장에서 중노동으로 번 돈으로 마련한 엘레나의 집은 전쟁으로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연 하나하나가 모아진 숫자가 난민 천만 명인 것이다. 이러한 비극을 초래한 이 전쟁은 아직도 끝을 알 수 없다. 더구나 ‘난민’에 대한 편견은 우리 사회 속에 만연해 있다. 제주도 예멘 난민에 대해 표출된 부정적 시선으로 인해,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을 데려오면서 ‘특별 기여자’란 호칭을 부여했으며, 이러한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는 고려인 마을 활동가들도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 고려인들을 ‘우크라이나 탈출 고려인’으로 명명하며, 이들을 난민이라기보다는 재난을 당한 동포로서 돕자는 취지의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전쟁 난민들을 난민으로 명명하기 어려울 정도인 난민에 대한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인식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우크라이나 탈출 고려인이든,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 고려인이든 이들에 대한 지원을 전적으로 민간차원에서 진행하도록 방치하고 있는 정부의 정책 또한 재고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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