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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바로 여성 혁명이다!이슈 2023. 2. 27. 05:30
구기연
마흐사 아미니, 그 이름은 상징이 되리라
“이란에서 다시 혁명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바로 여성 혁명이 될 것이다” 이 문구는 2014년에 시작된 한 인스타그램 ‘Women Revolution’ 계정 시작 화면에 쓰인 글이었다. 8년 후 2022년 이 문구는 현실이 되었다. 2022년 9월 13일 22세 쿠르드 민족인 마흐사 아미니는 고향인 쿠르디스탄주 사케즈에서 테헤란으로 여행을 왔다. 그는 종교경찰의 히잡 단속에 걸려 경찰서에 있다가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지 2일 후 결국 마흐사 아미니는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평소에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 왔던 개혁주의 일간지 『샤르그(Sharq)』의 기자 닐루파 하메디가 병원 복도에서 마흐사 아미니의 아버지와 할머니가 껴안고 울고 있는 사진과 함께 이 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하였다. 한 용감한 기자의 보도가 온 나라와 국제 사회를 뒤흔든 거대한 파도가 된 것이다.
마흐사 아미니의 쿠르드 이름인 '지나 아미니' 사진을 든 시위대들 (위키피디아, Matt Hrkacfrom Geelong / Melbourne, Australia-Solidarity with the people of Iran) 테헤란에서 출발한 마흐사 아미니의 주검을 실은 운구차는 분노한 쿠르디스탄 민족들의 장렬한 행렬과 만나게 된다.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은 이란의 여성들에게, 쿠르디스탄 민족들에게 그리고 자유와 생명을 존중하는 이란의 많은 이들에게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마흐사 아미니는 죽지 않고, 그 이름은 상징이 되리라는 구호처럼 이란의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을 울리게 된다. 그 이후 약 3개월간 지속적으로 크고 작은 시위가 전국적으로 계속되었다. 히잡 단속에 분노한 여성들과 마흐사 아미니의 고향인 쿠르디스탄의 소수민족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번 시위는 기존의 반정부 시위와는 여러 가지 층위에서 달랐다. 이란 전역과 전 세대, 다양한 종족들, 그리고 세계 각지의 이란인 디아스포라들은 “여성, 삶, 자유”, “우리는 이슬람 공화국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외치며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연대 시위에 동참했다. 본 시위는 1979년 이슬람혁명 이래 가장 지속적이며 대규모인 반정부 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집회 때마다 울려 퍼지는 “여성, 삶, 자유!”라는 구호는 원래는 20세기 후반 쿠르드 자유 운동 당시 널리 쓰였고, ISIS에 대항하는 투쟁에서도 사용된 바 있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이슬람 공화국이 설립된 직후, 히잡의 강제화와 여성들에 대한 샤리아법 적용에 항의하는 대규모 여성들의 시위가 일어난 바 있다. 1981년 법제화된 이후 지난 40년 넘게 히잡 문제는 언제나 개혁적인 여성들과 이슬람 정권 사이의 ‘문화적 전쟁터’였다. 하지만 한 번도 히잡을 불에 태우거나, 이토록 많은 여성들이 연대하여 거리에서 히잡을 벗고 여성의 인권을 외친 적은 없었다.
물론 2022년 반정부 시위는 단순히 히잡 강제 착용이나, 단속에 대한 여성들만의 분노가 아니다. 그동안 억눌려온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문제들이 이번 시위를 계기로 그야말로 총체적으로 폭발한 것이다. 2018년 미국 트럼프 정부가 JCPOA(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포괄적공동행동계획)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이란 경제는 심각한 침체의 길로 빠지게 되었다. 물가는 40% 이상 올랐고, 청년 실업율은 2020년 최고 28%를 웃도는 수준이었다. 폭력적인 유혈 진압 앞에서도 계속되는 이번 시위를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지를 묻는 나에게 이란의 40대 지인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의식주가 달린 문제이다. 우리의 아들, 딸들을 더 이상 이 정권의 노예로 살게 할 수 없다”고 울부짖었다.
오늘날 이란 시위의 원동력은 이미 1997년 하타미 정권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이란의 젊은 세대들은 늘 이란의 변혁과 개혁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다. 특히 젊은 이란 여성들은 일상적이고 실질적인 위험에도 불구하고 저항의 목소리를 잃지 않아 왔다. 2006년 시작된 이란 여성들의 법적 지위 향상을 위한 백만인 서명 운동, 2009년 녹색운동, 2014년부터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시작된 강제 히잡 착용법에 대한 해시태그 운동 (#MystaelthyFreedom, #whitewendesday, #LETWOMENGOTOSTADIUM)에 이르기까지 이란의 여성들은 언제나 ‘용감한 사자들’이었다. 이란의 여성들과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을 향한 사회적 규범과 관습에 대해 저항해 왔고, 또 다른 혁명을 꿈꾸며 그토록 위험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드높였다.
이란 시위를 이끄는 동력, Z세대
이란의 시간은 우리와 다르게 흐른다. 2023년 3월 기준 이란은 1402년이 된다. 이란의 MZ세대 즉 1380년대생들은 이번 시위에 누구보다고 적극적으로 등장하면서 이란을 포함한 온 세계를 놀라게 했다. 시위 동안 국제 사회와 정부뿐만 아니라 시위대를 놀라게 한 것은 이란의 1380년대에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지금 이란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우리의 권리를 되찾는 과정이예요. 우리 모두 자유롭고 안전하고 행복할 권리가 있지 않나요? 하지만 우리나라 대통령은 자유로워질 권리를 이란의 소녀들과 소년들에게 주지 않아요. 행복하려면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합니까? 무엇을 입을지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 하나요? 우리의 머리카락이 그렇게도 치명적인가요?” BTS 아미로 활동하는 이란의 한 10대가 sns를 통해 나에게 보낸 글에는 분노가 어려있었다.
교실에서 연대 항의하는 이란의 10대 소녀들 (출처: SalamPix/abaca/picture alliance) 이란의 10대들은 여느 사회의 10대들과 다르지 않은 미디어 환경에서 자라왔다. 어쩌면 다른 어떤 세대들보다 더욱 많은 양의 해외 미디어 콘텐츠를 소비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불법인 위성 채널과 인터넷을 통해 이미 글로벌적 시각을 가진 이들이 만족할 수 있는 이란 국내 미디어 콘텐츠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인터뷰에 응한 사라(가명)는 안전 문제로 시위에 직접 참여할 수 없을 때는, 밤마다 집안에서 구호를 외친다고 했다. 이란의 중고등학생들은 자신들의 교실 벽마다 걸려있는 최고지도자들의 사진을 찢었다. 그리고 교과서 앞표지의 ‘혁명의 아버지’ 이맘 호메이니의 사진도 찢어버린다. 이번 시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이란의 10대들은 도발적으로 벌이고 있다. 항의의 표시로 히잡 속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보이며 친구들과 교실 안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인터넷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터넷 세대’라는 별칭이 있는 세대답게 이란의 Z세대들은 해시태그를 통한 온라인 활동을 통해 연대의 목소리에 동참했다. 이란의 부모들 역시 자신의 아들, 딸들이 더 이상 부패된 정권에서 일상을 위협받으며 지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란의 전세대들은 더 나은 조국의 미래를 위해 용감하게 거리로 나선 것이다.
이란은 어디로 갈 것인가?
2022년 12월 핀란드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이란계 쿠르드 평화운동활동가는 인터뷰 장소에서 나를 만나자 마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란 당국이 이번 시위에 가담한 젊은이들을 사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시위로 18명의 시위대가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 중 한 청년은 공개 처형 당했다. Human Rights Activists News Agency(HRANA English (@HRANA_English) / 트위터 (twitter.com))에 따르면 2023년 2월 17일을 기준으로 사망자는 529명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그 중 18세 이하 청소년, 아동들도 71명 사망했다.
그렇다면 히잡 시위는 종결된 것인가? 이란 시위대는 단연코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미 이 시위는 혁명이 되었고, 이 혁명은 계속될 것이라 단언했다. 1995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이란의 인권 변호사 쉬린 에바디는 그 역시 이란계인 CNN의 아만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여성들이 이란 민주주의의 문을 열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국가의 변화는 정권을 바꾸지 않으면 이루어 낼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 과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결국엔 이란의 국민들이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선언했다.
1402년을 코앞에 두고 있는 이란은 위태롭고, 시민들의 삶은 불안정하기만 하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40년 넘게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최대의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이란은 2017년 말부터 지금까지 이란 리알(RIs) 가치 하락과 경제난으로 인해 전통적인 이슬람 정부의 지지자 세력인 시장 상인들과 노동자 계층, 교사들에 이르기까지 연이은 파업에 돌입하고 있다. 특히 ‘젊은 이란’을 이루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심각한 실업률과 인권 문제 등은 이란의 평화와 민주화의 가장 큰 걸림돌로 여겨지고 있다. “시리아는 잊어라! ‘우리’부터 생각해!”, “가자도, 레바논도 아닌 우릴 위해 희생하리라!”는 새로운 정치구호들처럼 이란 시민들은 대외적으로 오해받는 것처럼 중동의 패권을 장악하고 ‘이스라엘에 맞서 무슬림 형제들을 구하겠다’라는 포부는 더 이상 없다. 더욱이 2019년 11월에 유가 인상으로 촉발된 최악의 유혈사태를 부른 경제난을 맞아 일어난 대규모 시위와 ‘여성의 죽음’으로 촉발된 현재의 시위까지 앞으로 이란의 정세는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그토록 원하고 기대하던 이란 핵협상 역시 교착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번 시위로 이란 신정 체제가 쉽게 무너지리라 예측하는 이는 없다. 시위가 지속될수록, 소수민족들이 주로 거주하는 발루체스탄이나 쿠르디스탄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강경진압이 진행되었으며, 이란 정부는 실제로 강도 높은 공포 정치를 펼쳤다. 하지만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무력으로 시민들을 제압한다고 해서 결코 이슬람 정권이 원하는 ‘정권의 안정’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2019년 11월과 2022년 시위에서 보여준 이슬람 정권의 잔혹한 탄압에 대한 반발은 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욱 갑작스러운 결과로 돌아올 수 있다. 이미 이란의 역사는 혁명으로 그 과정을 증명한 바 있다. 대학생, 바자르 상인들, 석유화학 노동자, 변호사 그리고 중학생들에 이르기까지 이란의 시민들은 두려움 앞에서도 ‘자유’를 외친다. 보안군의 총부리와 강력 진압 앞에서도 “이란을 다시 되찾을 때까지, 우리는 싸울 것이다. 우리는 죽을 것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는 시민들의 마음은 결코 이 시위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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