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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초대합니다.기획 주제 2022. 9. 1. 00:00
수경
2022년 한국에서 폭력에 관해 말할 게 뭐가 있나,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얼마 전까지 멕시코의 페미사이드 통계와 여성 살해 사건에 관한 수사 보고서를 들여다보고 있던 나로서는, 새벽까지 불 켜진 서울에서 늦은 귀가를 염려하는 부모님의 마음이 필요 이상의 불안이라고 여겨진다. 각종 매체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더위에 지치고 하루의 일상이 버거울 때 그 뉴스는 귓등으로 흘려듣기 십상이다. 언론의 사회면을 채우는 폭력의 현장에서 감지하는 것은 ‘폭력’보다는 폭력이 야기하는 ‘자극’에 가깝다.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미시적 폭력에 관해서라면, 그에 대처하는 방법 하나쯤은 이제 우리 모두 갖추고 있지 않은가. 사회적 주류에 적당히 몸을 맡기고, 너무 고된 삶을 자초하지 않으며 살아갈 정도의 요령을 터득한 사람이라면, 2022년 한국에서 ‘폭력’이라는 단어는 일상적이지만 생경하다. 나는 ‘폭력적’이지 않으며, 우리 사회도 ‘폭력적’이지 않다. 다만 일탈적 폭력이 발생할 뿐이다. 일탈적 폭력이 발생하는 횟수가 많아지고, 강도가 세어지는 것은 우려스럽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대체로 안온하다.
매너리즘에 빠진 이러한 현실 인식에는 두 가지가 전제된다. 내가 있는 곳을 폐쇄적으로 전제하고, 그 폐쇄된 공간에 있는 ‘우리’와 ‘폭력’ 사이에 선명하고 깊은 분할이 존재한다는 전제다. 폐쇄된 공간이란 나의 일상이 이루어지는 물리적 공간으로 아주 좁게 설정되기도 하고, 한국어를 통해 꽤나 설득력을 가지고 상상되는 공동체로서 한국이라는 국민 국가이기도 하다. 폭력이란 일상과 상상이 미치는 이러한 범위를 넘어서서 발생한다. 우리는 그렇게 굳게 믿는다. 그래서 그 믿음이 흔들릴만큼 폭력이 가까이에서 목격되면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나의 장소’는 더 좁게 재설정되거나 폭력을 더더욱 일탈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가령 내가 가본 적이 있는 장소나 언제든지 갈만한 장소에 들이닥친 폭력을 목격하면, 그 폭력을 나의 일상과 연결 지어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일회성의 일탈로 단숨에 치워버리기 바쁘다. 외부에서 폭발해서 생채기를 낼 뿐, 안으로부터 폭발해 내상을 입힐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혹은 폭력으로부터 분리된 안전한 나의 장소를 만드는 일에 골몰하여 더 작은 공간 안에 자신을 밀폐시킨다. 아파트 단지에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는 것도, 난민 수용을 거부하는 것도 우리가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지키는 방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입을 바라보며, ‘전쟁주’에 주목하라는 말도 할 수 있다. ‘방위산업관련주’도 아닌 ‘전쟁주’라는 직관적인 표현이 회자되는 데 섬뜩함을 느낄만한 감수성조차 고갈된 시장중심주의와 전쟁을 파괴와 소멸이 아닌 자본 증식의 생산 수단으로 보는 시선에는 전쟁은 ‘그곳’에서, 전쟁에서 파생되는 물질적 이익은 ‘이곳’에서라는 구분이 작동한다. 폐기된 지 오래된 표현이지만, 제1세계와 제3세계라는 표현에는 그나마 ‘세계’라는 상이 투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제1세계로서의 자아상도 갖고 있지 않고, 제3세계라는 부름에도 답하지 않는다. 종종 ‘한국’은 세계 외부에 덩그러니 존재한다. 우리 안으로 바로 흡수되는 사건이 아닌 한, 세계에서 발생하는 선혈이 낭자한 현장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감싸안고 웅크려 숨는다.
Randa Maroufi 작(作) 〈Bab Sebta〉(2019)의 한 장면 ⓒsoo_Madrid, Spain_2021 우리에게 폭력이 생경한 까닭은, 폭력을 내 삶의 무대 안에서 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무대를 접고 접어, 한국이라는 작은 공간 안으로 밀어넣기 때문이다. 폭력이 내 삶의 테두리 밖에 존재하기 때문에 멀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이해하는 데 폭력을 폭력으로 적극적으로 사고하지 않기 때문에 생경하다. 그리하여 바르고 정상적인 ‘우리’와 일탈적이고 후진 ‘폭력’ 사이에 존재하는 분할에 관한 전제는 굉장히 타당해보인다. 상대적으로 안온한 삶이 유지되는 이곳에서의 삶은 저 밖의 피투성이 현실과 겹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에서 폭력이란 ‘폭력적’이라는 형용사로 사용되거나, 스펙터클로 존재한다. 그저 저 밖에서 흩뿌려지는 누군가들의 핏방울이 이곳으로 튀어 불쾌한 얼룩을 남기지나 않을까 조바심을 내는 것으로 그만이다.
인권과 정치적 합의 같은 휴머니즘적 규범을 발의함으로써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우위를 점하는 제1세계에 편입되지도 못하고, 범죄와 폭력에 기대어 소비주의 사회 안에서 제자리를 찾으려는 제3세계의 에피스테메 안으로 추락하지도 않은 우리는 불안하고 불길한 조짐에 휩싸인다. 합법, 안녕, 평화라는 규범을 수용하고, 그 안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우리는 그 규범을 지시하고 강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제3세계가 구가하는 디스토피아적 에피스테메를 불안한 눈길로 쫒는다. 제3세계는 다양한 몸들에 폭력을 가하고, 죽음을 주선하는 것으로 통치한다. 제1세계의 ‘생명정치’와 평행을 이루는 제3세계의 ‘시신정치’는 우리에게 낮선 세계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세계를 파악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되기보다 불길하고 위험한 알길 없는 어둠으로 남는다. 그리하여 현실을 각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제가 필요하다. 세계를 사고할 것과 세계를 사고하는 모델로서 폭력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를 사고한다는 것은 국민 국가라는 퍼즐을 맞춘다는 뜻은 아니다. 제1세계와 제3세계로 구분된 국민 국가들의 합집합을 다룬다는 뜻도 아니다. 혹은 국민 국가의 해체를 성급하게 상정한다는 뜻도 아니다. 세계를 사고한다는 것은 여러 ‘우리’가 맺는 관계를 추적해나간다는 의미다. ‘우리’는 종종 국민 국가와 등치되기도 하지만, 반드시 국민 국가 혹은 민족 정체성에 따라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국민 국가는 ‘우리’를 구성하는데 여전히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국민 국가는 세계, 즉 여러 ‘우리’들이 맺는 관계에 파장을 일으키는 주요한 진원지 가운데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로 세계의 구성 요소는 아니다. 국민 국가는 우리에게 자주 출몰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젠더 이분법의 틀 안에서 형성되기도 하고, 그 틀 밖에서 ‘우리’를 만나기도 하고, 야생의 자연과 얼마나 가까운 곳에 머무르냐에 따라 형성되기도 한다. 물론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와 결착된 정도 역시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세계를 사고할 것을 주문하는 것은 ‘국제 관계’ 혹은 ‘이국’을 살펴야 한다는 주장이라기 보다 ‘우리들 간의 관계’와 ‘이방’에 질문을 던져 보자는 제안이다. 무엇보다 오늘의 ‘우리’는 무엇에 직면하여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어제의 ‘우리’는 무엇을 다루고자 그렇게 구성되었던 것인지, 내일의 ‘우리’는 무엇을 직면하기 위해 구성할 것인지 들여다봐야한다.
그래서 이제 말하는 제1세계와 제3세계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경제규모에 따라 발전 국가와 저발전 국가를 지칭했던 것과 다른 의미다. 제1세계와 제3세계는 국민 국가라는 퍼즐 하나하나의 뒷면에 붙여진 꼬리표가 아니다. 동심원처럼 평면적인 중심부와 주변부를 이루거나, 북반구와 남반구처럼 구분되지도 않는다. 두 세계는 모자이크처럼 섞여있다. 공간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섞여있다. 휴머니즘이 지배하는 제1세계와 폭력이라는 에피스테메가 정치경제적 논리로 작동하는 제3세계는 곳곳에서 조우한다.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한 안온한 삶의 전경 속에서 핸드폰 터치 몇 번으로 전쟁주를 매도하는 것처럼 도심대로와 뒷골목 사이에서, 금융자본이 움직이는 산업과 범죄조직이 관할하는 산업의 협력 시스템에서 교차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1세계와 제3세계를 대비시키는 것이 아니다. 휴머니즘과 폭력이라는 상반되어 보이는 서로 다른 두 논리가 가치의 생산과 소비라는 동일한 자본주의의 습성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때문에 휴머니즘이라는 윤리적으로 우월한 지위에서 폭력을 일탈로 단정하거나 기피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Ruta de Che Guevara ⓒsoo_Valle Grande, Bolivia_2019 폭력은 무엇보다 인간의 살점을 후벼 파고 피가 튀는 일이다. 폭력을 상징적 차원에서 그리고 미시적으로 다루는 것은, 그리고 그렇게 다룰 수 있음은 특권이다. 핏물 흡수 패드까지 깔고 깔끔하게 랩으로 씌운 채 매대에 놓여 밝은 조명을 받고 있는 고기를 집어들면서, 동물을 죽여 해체하고, 뼈와 살점을 발라내는 과정을 눈앞에서 치운 것과 마찬가지다. 고기를 소비하는 것의 의미를 알기 위해 더 이상 내 앞에 시전되지 않는 장면들을 소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세계를 사고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살점을 후벼 파고 피를 튀게 하는 실천이 내 삶과 결착되어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이 세계는 휴머니즘의 규범으로 잘 포장되어 있지만, 폭력이라는 에피스테메에 의해 유지되고 작동한다. 살아있는 인간을 상품으로 만들고, 그 생명으로 숨을 불어넣었다던 고전적인 자본주의 해석과 달리 자본주의는 언제나 산 인간으로부터 생명을 빼앗고 죽은 몸뚱아리로 만들면서 생명을 얻었고, 호흡을 계속해나갔다. 16세기의 노예제가 그러했고 20세기의 전쟁이 그러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국제 경제를 움직이는 중요한 축인 에너지 분야는 언제나 전쟁을 수반하거나 전쟁 발발의 잠재적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이제 인간의 신체를 무너뜨리고 생명을 빼앗음으로써 이윤을 창출하는 구조는 개인의 생존 전략으로 진화했다. 신체를 여성화하고, 여성화된 신체를 무너뜨리며 쾌락을 판매하는 불법 동영상의 생산, 유통, 소비가 얼마나 촘촘하고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세계를 사고하는 것은 폭력을 시야 밖으로 내몰거나 비정상이라는 꼬리표를 손쉽게 달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휴머니즘과 신자유주의가 결합된 이 시대의 자본주의에서 폭력은 세계를 작동시키는 정상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다. 휴머니티가 제거된 몸뚱아리로부터 우리는 가치를 생산한다.
우리가 생산하는 가치가 비인간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다시 구성된다.
커버사진: 알바루 시자 작(作) 소요헌 ⓒsoo_사유원_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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