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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화상기획 주제 2023. 2. 27. 05:30
수경
원성원作 <언론인의 바다> 2017ⓒsoo_수원시립미술관_2022 경고등이 켜진 지 한 세대가 흘렀다. 1991년 『녹색평론』은 창간사에서 “우리들의 대부분은 오늘날 우리의 삶이 일종의 묵시록적 상황에 임박해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애써 이것을 부인하거나 외면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스스로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안팎의 모든 체험에 비추어 다소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 각자는 저마다 내심 깊은 공포를 느끼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밝혔지만, 돌이켜보면 “내심 깊은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고작 최근 10년의 일인 듯 싶다. 2014년 2월 환경부 국립환경과학원에서 미세먼지 예보를 시작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묵시록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시작했다. 시야를 가리고 호흡기로 느껴지는 물질이 하루의 일상을 좌지우지할 정도가 되어서야 우리는 똥줄이 타기 시작했다. 환경운동이 대중운동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은 2019년 그레타 툰베리가 주목받으면서였고, 그로 인해 새로운 도약에 성공했다. 대표적인 국내 환경운동단체인 ‘환경운동연합’이 창립된 것이 1993년임을 떠올려본다면, 이제 와서 왠 호들갑인가 싶을 지경이다.
같은 시기 국제 사회에서도 경고등을 울리기 시작했다.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채택된 유엔 「기후변화협약」은 “지구의 기후 변화와 그 악영향이 인류 공통의 우려임을 인정”한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인류 공통의 우려”가 강제성을 띠고 삶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교토의정서」의 1차 이행 기간이었던 2008-2012년부터였다. 유럽연합 등 일부 국가에 제한된 강제성이었지만, 1990년 대비 온실가스 농도를 5% 저감시키는 정책을 이행했다. 그리고 2015년 「파리기후협약」에서 전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1.5° 이내로 제어하겠다는 결정을 내렸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구별하지 않고 모든 국가가 당사자국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모두가 우려하지만 대체로 무관심했으며, 내 삶의 번거로움을 애써 감수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몇 마디의 말로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하기는 쉬웠던 기후위기라는 사안은 그제서야 우리의 삶으로 훌쩍 넘어 들어왔다. 우리 사회의 일상에서 그런 변화를 체감한 것은 2018년 매장 내 일회용품 사용이 규제되기 시작하면서부터가 아닐까.
인류가 일군 문명이 자연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으며, 이를 바로 잡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이다. 1980년대까지 대부분의 사회는 인류가 창조해온 물질문화와 정신문화에 지나치게 심취하고,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인류를 조건지우는 것들, 인류의 창조 범위 밖에 위치한 것들, 인류의 창조에 깊숙이 개입된 것들을 다루어 낼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의식과 잘못되어 가는 것을 바로잡기 위한 능력을 갖추려 우리가 행동을 하기까지 거의 한 세대가 걸렸다. 아니다, 지금도 행동으로 옮겨오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만 무거운 우리의 몸은 쉽게 꿈틀거리지 않는다.
2022년 지구위험한계 [출처: www.stockholmresilience.org] 기후과학 담론은 최근 10여년 동안 그래프와 데이터로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의식에 질감을 부여했다. 과학 담론으로 시각화되고 데이터로 정량화된 묵시론적 상황은 무겁게 내려앉은 우리의 몸을 간신히 간간이 움찔거리게 한다. ‘지구위험한계’ 같은 지표, 지구 지표면 온도와 이산화탄소 농도의 변화 추이를 보여주는 각종 그래프는 우리의 정서와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며 우리의 몸을 들썩이게 한다. 당장 추위와 더위가 예년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는 심장이 덜컹한다. 수십 년의 격차를 두고 찍힌 두 장의 사진이 보여주는 지표면의 변화에서 섬뜩함을 느낀다. 길게 보면 산업혁명 이후, 짧게 보면 20세기 이후 자원을 아낌없이 소비하며 안락함을 만끽한 데서 죄책감을 갖는다. 그렇게 ‘뭔가 잘못 되어 가고 있다’는 데 대한 합의에 우리는 이윽고 도달했고, 겨우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파리기후협약」에 서명한 195개국은 2050년 탄소중립을 목표로 구체적인 감축 목표를 제안했다. ‘신기후체제’라는 이름 아래 기후위기란 지구 평균 기온 상승으로 풀이되었고, 기후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방안은 1.5라는 숫자로 정확히 지시되었으며, ‘탄소중립’ 전략이 수립되었다. 미세먼지, 이상 기후 등 주관적으로 상상되던 묵시론적 상황은 ‘지구 온도 1.5°이상 상승’으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 과학자들은 기후위기에 대응하려는 현재의 사회적 합의가 과학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질타한다. 지구위험한계 개념을 제시한 과학자들은 「파리기후협약」에서 약속한대로 온실 가스 배출량이 감소하더라도 지구 온난화는 막을 수 없다는 가설을 제기한다. 또 다른 한편에서 과학자들은 과학적 지식에 무지한 채 우리가 지나치게 쉽게 사회적 합의에 도달했다고 의구심을 제기한다. 이들은 기후위기가 오해에서 비롯된 걱정이라거나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반박한다. 이들에 따르면 유엔에서 발간하는 기후위기관련 보고서란 자연적 현상이 기후변화를 사회적 현상인 ‘위기’로 가공하여 기후위기를 자연적 현상이 아닌 사회적 현상으로 실체화한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기후변화가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는 주장은 과학적 검증이 더 필요한 일이다.
지금 이곳에서 발생하는 변화들을 누군가는 ‘현상’이라고 본다. 인간은 그 현상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요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고, 그 현상에 의한 결과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그 변화들을 ‘위기’라고 진단하고 책임과 해결을 요구한다. ‘인류세’로 명명될 만큼 인간이 그 변화에 절대적 요인으로 작용했고, 그 변화는 파국적이므로 이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책임에 관하여 누군가는 윤리적 책임을, 또 다른 누군가는 경제적 책임을, 또는 사회적 책임을 주장한다. 오늘날 목격되는 자연현상의 변화를 ‘기후위기’로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인지, 인간이 감히 짐작하기 어려운 억겁의 세월 끄트머리에 ‘인류세’를 명명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과잉된 자의식의 발로인지, 인간이 주변 사물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해 이제서야 겨우 고민하기 시작한 긍정적인 신호로 봐야 할지, 우리는 교차로 위에 서 있다.
순간순간 우리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묵시론적 상황에 대한 깊은 공포는 정확히 무엇에 대한 공포인가. 정량화된 데이터에 기반하여 진단된 기후위기에 대한 ‘인류 공통의 우려’란 정확히 무엇에 대한 우려인가. 그것은 인류종이 척박해질 자연환경에서 인내하며 살아가야 하리라는 예상에서 비롯된 우려이며, 인류종의 소멸에 대한 공포에 다름 아닌가.
그러한 종류의 우려와 공포에서 시작된 문제설정은 정확히 동일한 종류의 해결을 요구한다. 1.5°내로 지구 기온 상승을 억제시킨다는 목표에 합의한 결과 이제 묵시론적 상황의 존재 여부는 정량화된 지표로 판가름된다. 쟁점이 되는 것은 1.5°라는 수치에 도달하기 위하여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로 좁혀진다. 그리고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과 역량을 갖춘 단위는 국제기구와 정부로 제한된다. 그들이 1.5°라는 수치에 객관성과 권위를 부여하였고, 비정부 기구, 활동가 개인, 지식인, 언론 등 그 외 단위는 그 객관성과 권위에 대체로 동의했다. 그래서 기후위기에 관해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정부이고, 사회는 정부를 향해 요구하는 데 매진한다.
기후변화 뿐 아니라 생태환경 전반의 변화에 설득력 있는 진단을 내리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은, 혹은 그럴 수 있다고 믿어지는 유일한 사회적 행위자는 국가이다. 그리고 국가 간 협약은 그러한 믿음에 긍정적 신호를 보낸다. 정부는 기대하는 역할을 잘 해내려고 노력한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발하며 윤리적 책임을 충실히 이행한다고 설파한다. 그리하여 이 사안에 대한 주도권은 오랫동안 정부와 국제기구의 손에 쥐어졌고, 대중운동의 안건으로 상정되었음에도 기후위기를 둘러싼 사회운동은 여전히 이 사안을 정부 혹은 정부들의 연합체인 국제기구로 환수시킨다. ‘환경문제’는 한 세대 전에 이미 제기되었고, 이를 가장 급진적이고 선도적으로 이끌었던 것은 사회단체, 지식인, 활동가들이었지만, 이제 국가 주도 담론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기 쉽지 않다.
1991년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1차 유색인 민족 환경 지도자 정상 회의 The First National People of Color Environmental Leadership Summit」 에서는 세계 각지의 유색인 지도자들이 다인종 운동과 함께 환경정의를 표명했다. 환경 정의에 관한 17가지 원칙을 통해 환경 문제의 피해가 빈민과 유색인에게 편중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생태위기를 자연환경에서 발생하는 환경의 변화와 그 변화가 보편적 인류에게 미치는 악영향보다는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자연자원에 대한 접근이나 환경오염 피해에 계층적, 인종적 차별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일찍부터 상기시켰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한 시점부터 생태위기가 인간 사회의 구조적 모순, 즉 불평등과 연동되어 있다는 점을 함께 사유했으나, 국제 협약과 과학 담론의 뒷받침을 받은 국가가 기후위기의 진단, 평가, 해결을 모색하는 동안 사회는 발언권을 잃어갔다. 대통령 직속 2050 탄소중립위원회 해체를 요구하는 공동대책위원회가 2019년 출범하고, 2022년 4월 <체제 전환을 위한 기후정의동맹>이 행동하는 성소수자인권연대, 홈리스행동, 대학생기후행동 등의 주도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정부가 기후위기에 대해 독점한 발언권을 회수하겠다는 의미있는 사회적 표현이었다. 2022년 9.24 기후정의행진은 ‘기후위기’를 대중적 사회운동의 주요 안건으로 상정시켰다.
인류의 물질문화가 선사한 안락함과 인류의 정신문화가 부여하는 자부심은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의식과 부딪히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낸다. 잘못 되어 가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 물질문화가 베푸는 안락함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오히려 헛되다. ‘녹색성장’이니 ‘탄소중립’ 따위의 대응 전략은 우리가 누리는 물질문화가 안락함을 영원토록 보장해주리라는 새로운 약속에 가깝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감축하겠다는 목표는 새로운 에너지 산업을 ‘성장’시키겠다는 전략을 고안해냈지만, 사실상 화석연료를 중심으로 편재된 산업구조와 경제 체제의 답보 상태에서 벗어나야만 유지되는 오늘날의 정치경제체제를 보존하는 안전장치로 기능한다.
우리의 의식을 날카롭게 베어내는 마찰은 오히려 인류가 구축해온 정신문화에 균열이 생길 때 발생한다. ‘뭔가 잘못되게 만든’ 정신문화와 그러한 정신 위에 정초한 정치경제 시스템, 즉 소비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때 발생한다. 그러한 균열과 마찰은 필요하다. 그리하여 지금 기후위기는 국제 사회의 이슈나 국가 산업구조의 재편이나, 인류의 재앙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와 우리 시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계기이다.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 홈리스, 청년 등이 기후위기 운동과 가장 적극적으로 접점을 만들어내는 까닭도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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