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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폭력 드러내기기획 주제 2022. 9. 1. 00:00
염운옥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해 생각한다. 폭력이 ‘보인다’, 폭력을 ‘본다’는 건 무엇인가? 두 인간의 몸과 몸이 맞부딛쳐 서로의 육체를 상처입히는 장면을 보는 것일 수도 있고, 칼, 총, 대포, 미사일 같은 무기가 잔인하게 파괴한 인간의 주검으로 폭력을 마주할 수도 있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지대 티후아나는 잔인하게 살해된 인질의 시신이 자본으로 거래되고, 마약 카르텔 조직범죄집단이 폭력을 역량 강화의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국가권력의 기능을 일부 대체하고 있는 곳이다. 티후아나에서 대로변이나 육교에 내걸려 전시되는 시신은 잔혹한 폭력의 증거물이다. 인간 생명의 폭력적 파괴와 그 시신 위에 구축된 멕시코의 자본주의는 고어 자본주의(gore capitalism)라고 불리기도 한다.
폭력의 물리적 거처는 피해자의 몸이다. 피해자가 상처 난 몸을 가리거나 숨어들 때 폭력은 보이지 않게 된다. 혹은 가해자가 폭력을 저지르는 장면을 공개하고, 시신을 거래의 대상이나 인질로 전시하지 않는다면 폭력은 은폐된다. 콜롬비아의 푸에르토 베리오 마을 사람들은 막달레나강을 따라 떠내려오는 신원미상의 시신을 ‘입양’해 납골당을 만들어 보살피고 기도한다. 먼저 죽은 사랑하는 가족의 이름을 붙여주고 진혼하기도 한다. 푸에르토 베리오는 지난 30여 년 동안 게릴라 조직과 마약 카르텔 사이에 벌어지는 다툼으로 인한 폭력의 중심지였다. 어부의 그물에 걸려든 물체가 사람의 머리임을 확인하고,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시신을 건져 올린다. 하지만 그/그녀가 어디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피가 튀고 관절이 꺽이고 뼈가 부러지는 폭력은 보이지 않는다.
Juan Manuel Echavarria 작(作) Requiem NN 2006~2013 ⓒYeom_Tate Modern_ London_2022 갱단이나 범죄조직이 자행하는 ‘영화 같은’ 폭력이 일상에 노출되는 일은 흔하지 않다. 물론 현대 국가 어디에서든 조직적 폭력 집단이 국가 공권력을 음지에서 뒷받침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공권력의 공모와 통제와 관리 아래 음지의 폭력이 대낮의 거리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폭력의 엄연한 존재와 당연한 은폐 사이에서 또 다른 유형의 폭력에 대해 생각한다. 천천히 강도를 높여 조여오는 폭력, 조금씩 느리게 내부로부터 인간을 파괴하는 폭력, 인간의 존엄을 바닥에 내던지고 자멸을 강요하는 폭력 말이다.
얼마 전 파리 20구 메트로 퐁드몽틔뢸 인근 거리, 여름날 평일 아침 출근 시간이었다. 길 위에 침대 매트리스만 놓고 그 위에서 자고 있는 ‘백인’ 남성 셋을 보았다. 그 장면만 잘라놓고 보면 평화롭게 단잠에 빠진 것 같았다. 이제 이례적이라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더워진 유럽 여름 날씨. 며칠간 파리의 최고 기온은 섭씨 40도 가까이 올랐다. 에어컨 없는 집이 더워서 지붕 없이 잠을 청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옆에 놓인 올망졸망 작은 짐들과 낡은 텐트로 보아 홈리스가 틀림없었다.
바쁜 아침 출근길 대로변에서 죽은 듯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이 남자들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들을 홈리스로 내몬 건 코로나19 팬데믹이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19로 인한 락다운과 비대면 활동의 증가는 대부분의 노동자에게 상승의 기회가 아니라 실업의 계기였을 뿐이다. 일자리를 잃고 집세를 못 내고 살던 집에서 쫓겨났을 테고 어쩌면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는지도 모른다. 이제 길 위의 삶에 따라올 비위생과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될 것이다. 피를 흘리고 있지 않다고 이들이 폭력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2020년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는 백인 경관에게 목이 눌리는 동안 “숨을 쉴 수 없어(I can’t breathe)”라고 외쳤다.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 거주하는 '미국 시민' 플로이드가 부당하게 제압당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이유를 생각할 때, '흑인'이라는 그의 인종적 조건을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플로이드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누적된 인종 편견과 인종 폭력에 의해 예견된 죽음이었다.
“숨을 쉴 수 없어”라는 외침도 처음이 아니었다. 백인 경찰이나 자경단의 폭력으로 숨진 수십명의 흑인 시민들이 했던 말이다. 그들이 의식을 잃기 전까지 반복해서 힘들게 내뱉은 이 말은 물리적 압박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목을 누르는 직접적 가격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편히 숨 쉬고 살아가기 힘들게 만드는 간접적이고 완만한 폭력을 포함한다. 플로이드의 마지막 8분 46초는 카메라에 담겼지만, 인종적 소수자가 천천히 느리게 그러나 차곡차곡 쌓여가는 인종차별의 폭력으로 마침내 질식에 이르는 과정은 카메라에 담기지도, 미디어에 보도되지도 않는다.
플로이드의 죽음은 “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는 운동을 불붙게 했다. 경찰이 촬영한 비디오 영상이 공개되면서 그가 죽음에 이른 과정이 비로소 보이게 되었고, 시민들은 인종정의를 외치며 분노해 거리로 나왔다. 그동안 경찰이나 자경단에 의해 죽임을 당한 흑인이 십여 명이 넘을 뿐 아니라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가해자의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흑인이 함부로 해도 되는 생명으로 취급당하고 있으며 생명정치의 대상이 아니라 죽음정치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현실을 폭로한다. 생명정치와 죽음정치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 장치로 존재하며 인종의 구분선을 따라 나뉘어 구사된다.
흑인이라는 인종적 위치는 실업에 처했을 때 미국 전역을 떠돌며 계절노동으로 살아가는 생활도 불가능하게 한다. 리만브라더스 금융 위기 사태 이후 미국 경제의 불황과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중산층이 파산하고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는 현상이 늘어났다. 몰락한 중산층 중에는 자발적 노마드 생활을 선택함으로써 파산에서 벗어나 삶을 다시 일구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만일 그/그녀가 ‘흑인’이라면? 노마드 생활은 불가능하다. 한밤중에 빈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잠을 청하는 순간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바로 연행되거나 몸싸움 끝에 변을 당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내몰린 삶에도 인종적 위계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한겨울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자다가 사망한 캄보디아 여성 이주노동자 속헹의 경우도 느린 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경우다. 이 사건은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이 얼마나 불안전에 내몰리고 있는지, 얼마나 함부로 해도 되는 존재로 취급되고 있는지 드러낸 사건이었다. 유독 추웠던 2020년 겨울 영하 16도 한파에 전기 난방이 끊긴 비닐하우스에서 이주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은 돌발사고가 아니라 사실상 예견된 참사였다.
인간은 태어나서 바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 줄 때 비로소 사람이 된다. 그 자리는 세상에 태어난 인간에 대한 환대일 수도, 이주민에 대한 친절일 수도 있고, 이주노동자가 살 집일 수도 있다. 속헹을 비닐하우스에 살게 했던 한국 사회는 그녀를 환대하지 않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느린 폭력을 그녀에게 행사했다. 비닐하우스나 컨테이너를 숙소로 인정하고 고용허가제 제도상 합법의 영역에 방조함으로써 말이다. 구조적 폭력은 보이지 않게 가려질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제도와 정책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더 악랄하다.
“비닐하우스는 집이 아니다”라는 구호는 속헹 사망 사건을 계기로 미디어에 자주 등장했지만, 사실은 이주인권단체가 이주노동자의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지난 4년여 동안 계속 외쳐 왔던 말이다. 하지만 살만한 곳에 살게 하지 않는 폭력은 계속되었고, 그 폭력이 임계점을 맞았을 때 사람이 결국 죽었다. 그리고 축적된 폭력의 결과물로서 속헹의 시신은 우리 눈앞에 보이게 되었다.
Downwards to the deep ⓒYeom_Tate Modern_London_2022 왜 폭력은 보이지 않는가?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왜 우리는 폭력을 보려 하지 않는가? 가까이 있는 폭력을 외면하는 이유는 나와 너를 가르는 무수한 경계선들을 넘으려 하지 않고 그 안에 안주하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에 대한 괜한 공감이나 감정이입으로 대체로 안전하고 평온한 나의 삶을 어지럽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교차하는 경계와 경계 사이에 끼어있고, 그 경계는 늘 흔들리고 다시 그어진다. 오늘 안전했다고 내일도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다.
예기치 않은 마주침도 일어난다. 몇 년 전 우리 집 반지하에는 필리핀 이주노동자가 세 들어 살았던 적이 있다. 스무 살이 갓 넘었을까 앳된 얼굴의 청년은 동네 조그만 가내공장에서 양말짜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번 여름처럼 폭우가 내린 어느 날, 배수로가 역류해 반지하 방에 물이 들어찼다. 반지하로 내려가 필리핀 청년과 함께 빗물을 퍼냈다. 정신없이 물을 퍼내고 겨우 사태가 진정되고 나자 반지하방을 세내줘 험한 꼴을 당하게 했다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괜찮다며 화도 내지 않는 그에게 박카스 한 박스를 건네고 돌아서는데 손목이 아파왔다. 오른 손목에 콩알만한 결절이 생겼다. 평생 힘든 일 안하고 보드랍게 살아온 내 손목은 물 퍼내는 노동을 못 견디고 기어이 고장이 난 것이다. 지금도 손목을 많이 쓰면 아파온다. 비닐하우스, 콘테이너, 반지하 주거 사이는 그리 멀지 않다. 악덕 고용주만 그러는 게 아니라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나도 연루되어 있다는 감각. 시큰거리는 손목의 통증이 연루의 감각을 일깨운다. 이 폭력의 감각이 연대의 토양이 되어주길.
커버 사진: 최소영 작(作) 〈푸른 풍경〉(2020)의 일부 ⓒsoo_청주시립미술관_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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