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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범에 도전하는 모든 소수자들의 연대로칼럼 2023. 2. 27. 05:31
백선영
Blackburn Youth Service girls' group International Women's Day banner 1988ⓒYeom_People's History Museum _Manchester_2022 ‘동반 자살’에서 ‘살해 후 자살’로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를 짓눌렀던 사건이 있었다. 발달장애인과 아버지가 사망한 채로 발견된 사건이다. 자폐 장애가 있는 청년을 살해하고 아버지 본인도 자살한 것으로 결국 타살 혐의는 없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됐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가 끝나지 않는 오늘까지도 참사는 한 달에 한 두 번 꼴로 반복되었다.
장애 학대의 가해자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건 가족이다. 장애인 가족이라는 위치에 서면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가족에 의한 장애인 살해를 ‘동반 자살’이 아니라 ‘살해 후 자살’이라는 용어로 고쳐 쓰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죽었는지 죽임을 당했는지 원인을 정확히 규명받을 권한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 발달장애 당사자의 위치였다. 아직도 갈 길이 멀기만 한 이 발달장애 운동에서 ‘당사자성’은 어떻게 고민되어야 하는 것일까.
“온전하고 의미 있는” 삶이란?
발달장애에 대해 정의할 때 “지적·정서적 발달이 항구적으로 어려운 상태”라는 문구가 쓰인다. 가족들은 ‘항구적 어려움’, ‘불능’이라는 문구에서 벗어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다가 결국 이것이 답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장애는 치료되어야 하고 재활시켜야 한다는 의료모델과 정상성의 상태에 맞춰져야 한다는 전제는 얼마나 단단한가. 머지않아 우리의 삶을 더더욱 옥죄고 있는 것은 이런 프레임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내가 아이와 함께 살아가면서 느낀 가장 가장 어려운 지점이기도 하다.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아이를 규정하고 판단하는 내 모습을 볼 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없이 장애를 ‘정의(定義)’하려 했다. 어쩌면 장애 당사자가 아닌 타인으로서 장애를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무례한 일일지도 모른다. 보통 정의는 문제 해결을 위한 첫 단추가 되어주지만, 살아가는 문제에 수학 공식처럼 딱 떨어지는 정의가 어디 있는가.
발달장애의 삶을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 발달장애 관련 제도의 주된 캐치프레이즈 중에 “발달장애인들의 온전한 하루, 의미 있는 삶”이라는 것이 있다. 온전한 하루는 무엇이고,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일까. 어떤 것이 보장되어야, 온전하고 의미 있고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 발달장애인들에게 하루 24시간 조력이 필요하다는 정의는 역으로 발달장애인들은 하루 온종일 돌봄만 받는 수동적 존재라는 전제를 강화하는 것이 아닐까. 얼마 전에는 불이 난 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망한 발달장애인의 사건이 있었다. 작년 폭우 사태 때 반지하 집에 갇혀 사망한 발달장애인의 사건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재난에 대해 대비하고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는 비장애인들에 비해, 장애인들이 놓인 취약한 조건은 분명히 존재한다. 집에 화재라도 난다면, 낯선 곳에서 실종이라도 된다면, 가족들을 짓누르는 온갖 ‘만약’이라는 가정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며 장애 당사자의 ‘생존’을 좌우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의 생존을 이어가게 하는 중요한 요소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의 조력 말고는 없다. ‘우리는 누구나 돌봄과 조력을 필요로 하는 취약한 존재다’라는 선언이 보편화 되고 있고, 돌봄과 조력을 당당히 요구하는 포지션으로의 전환은 장애인 운동에서도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
사람을 살게 하는 노동이 온전히 나에게 달려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어려운 의사소통 방식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소통하는 노동이나 중증 중복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수시로 해야 하는 간호 노동처럼 내 신체의 모든 감각을 강도 높게 쓰면서 이 노동이 멈추면 큰 타격을 입는 타인이 내 곁에 존재한다는 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줄까? 누군가 ‘연결된 신체’라는 말을 하던데, 가족으로서 돌보는 위치에 놓이는 것은 당사자의 몸과 내 몸이 한 몸처럼 반응하는 일과 같다. 아기를 돌볼 때 수시로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처럼, 대체로 발달장애인의 양육자들은 같은 노동의 형태를 생애주기를 넘어 반복한다. 타인의 생존이 온전히 나에게 달려 있는 상황에서 타인과 나를 분리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고유의 아픔과 고통을 공유하는 신체, 그 속에서 ‘나는 나 너는 너’라며 타인을 타인으로 대하는 일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발달장애인의 감각과 시선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 지독한 비발달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발 디딜 곳 없는 삶을 산다고 느낄 때, 순간 함께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럴 수 있다. 물론 출구를 찾지 못한 가해자의 변명일지도 모르지만.
신발 끈을 고쳐 묶으며
장애인 부모단체에서 상근을 하면서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의 권리를 위한 운동을 하고 있다. 내가 가장 고민했던 것은 ‘당사자성’이었다. 발달장애 당사자의 권리를 우리는 어떤 비중으로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발달장애인들을 억압하는 가장 큰 기제 중 하나는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 규범이다. 일례로 ‘비장애 정상성’은 젠더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와 규범 체계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와 함께 산다는 것은 남성과 여성에 대한 생래적인 구분 자체가 무의미함을 깨닫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성별 구분을 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남성이 이렇고, 여성이 저렇고” 하는 수사 자체가 의미 없는 말에 불과했고, ‘모두의 화장실’ 논의가 있을 때 배변 처리가 어려운 장애나 질환을 가진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성별이 아니라 노동임을 끝없이 말해야 했다. 딸 아이의 배변 처리를 같은 성별이 해야 한다면 결국 엄마가 24시간 붙어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어려움을 어디에도 말할 곳이 없었다. 엄격하게 성별로 구분된 공간에서 장애는 그것을 넘나들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젠더 규범을 무화(無化)시킬 수 있는 무기가 아닌가. 성별로 범주화-사회화되는 과정에 편입되지 못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성소수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성별 인지가 어려운 발달장애인도 그러하다. 결국 젠더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남성중심성이라는 가치와 위계가 반영된 결과라면, 젠더 규범을 넘어 사회가 강요하는 모든 규범들이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어떤 질서를 학습시키려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다양한 존재의 상태를 인정하지 않으며 비장애 중심성, 정상성으로 강제하는 사회에 살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부적응의 상태가 신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규범의 문제라면 우리는 규범에 도전하는 모든 소수자들과의 연대로 이 운동을 다시 쓸 수 있지 않을까.
종국적으로 우리는 모든 어려운 행동과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효율과 정상성보다 다른 가치와 도구를 선택해야 한다. 가까운 타인으로서 내가 겪고 있는 장애는 정체성에 대해 ‘정의’가 아니라 ‘필요’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비교적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 그런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장애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이며, 때로는 고통이고 때로는 예기치 못한 기쁨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성장과 삶에 대해 영향을 줘야 양육자인 내가 거꾸로 영향을 받게 되는 여러 감정의 총체가 장애로부터 오기도 한다. 오랫동안 타자에 의해 정의되어 온 발달장애인들의 위치를 생각해본다. 양육자 혹은 가족 가까운 관계로부터 정의되어온 발달장애인들이 삶을 스스로 정의하기 위한 노력을 지지하는 것, 이 속에서 궁극적으로 당사자와 가족, 주변인을 분리하는 일, 분리할 수 없을 것만 같던 그러나 꼭 필요한 이 분리의 작업이 내가 하려는 운동의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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