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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이 퍼포먼스라면칼럼 2025. 8. 27. 02:28
염운옥
재작년 가을의 일이다. 곤지암 화담숲 단풍이 좋다길래 엄마를 모시고 보러 나섰다. 늘 바쁜 남동생과 겨우 시간을 맞추고 리조트 하룻밤 숙박을 예약했다. 단풍 계절 화담숲 입장권은 역시나 매진이었다. 취소 표를 얻으려 사이트를 며칠 동안 지켜본 끝에 겨우 오후 3시 입장권 석 장을 예약할 수 있었다. 다음은 휠체어 구하기. 80대 중반에 접어든 엄마의 나이 든 몸은 보행할 수는 있으되 오래 걸을 수 없다. 다행히 화담숲은 휠체어 탐방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동네 주민센터에서 휠체어를 대여했다. 아름답게 단풍이 든 숲길과 잘 가꿔진 정원을 돌아보는 데는 세 시간 정도 걸렸다. 내려오는 길에는 소나무 숲 사이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동생과 나는 사이좋게 번갈아 휠체어를 밀었다. 자작나무 숲길에서 엄마의 휠체어를 미는 동생의 뒷모습이 마음에 선명하게 남았다. 동생과 나 사이에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돌보며 생겨난 끈끈한 동지애 같은 것이 있는 데다 “이제 곧 엄마 차례야”라는 암묵의 결의를 공유하기에 서로 눈빛이 마주칠 때마다 감정이 일렁였다.
엄마는 어땠을까? 감정 표현이 풍부한 엄마는 소녀처럼 감탄사를 연발했고, 어느 때보다 많이 웃으셨다. 바쁘다는 아들딸이 시간 내준 것에 고마움과 미안함을 여러 번 말했다. 그런데 저녁 식사 자리에서 엄마는 잘 드시질 못했다. 원래 위장이 약해 소식이긴 했으나 평소보다 더 못 드셨다. 리조트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야 내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얘, 아까 휠체어 타고 내려오는데 어지럽고 울렁거려 혼이 났다. 오래 앉아 있으니 허리도 아프고.” 숲길 탐방로는 나무 데크가 깔린 곳을 제외하고는 울퉁불퉁했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많았다. 수동 휠체어를 미는 데 힘이 많이 들어 동생과 서로 지치지 않게 교대하는 데만 신경을 썼지 정작 휠체어를 타고 있는 엄마의 평안은 살피지 못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엄마는 덧붙였다. “네 동생에게는 말하지 마라. 괜히 마음 상할라.” 화담숲 프로젝트는 이렇게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다.
돌봄의 의미를 넓게 잡는다면 타인과의 관계 맺음이 일어나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돌봄의 주고받음이 개입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튜버 ‘굴러라 구르님’이자 작가인 김지우는 에세이 『의심없는 마음』에서 유럽 여행 때의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가는 기차 환승을 위해 내려야 하는 데 예약해 둔 철도청 직원은 무슨 일인지 오지 않았다. 무거운 전동 휠체어를 동행한 비장애인 애인 루가 혼자 들어 올릴 수도 없었다. 다급해진 두 사람은 최대한 큰소리로 “무슈!”를 외치며 주위에 도움을 요청했고, “뮤슈들”은 얼떨결에 지우의 휠체어를 번쩍 들어 하차를 도왔다고 한다. 지우와 루는 어그러지고 ‘삑사리’가 나기 일쑤였던 여행이 엉망이 되지 않도록 틈새를 메웠던 것이 모르는 사람들의 환대와 돌봄이라는 걸 경험했기에 의심없는 마음으로 “뮤슈!”를 외칠 수 있었다.
어쩌면 일상에서의 돌봄은 한 편의 짧은 연극이나 퍼포먼스처럼 수행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극배우이고 무용수이기도 한 장애예술가 김원영은 『실격당한 자를 위한 변론』에서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김원영은 골형성부전증으로 어릴 때부터 휠체어를 사용한다. 초등학생 시절 산으로 계곡으로 함께 놀러 가지 못하는 그를 위해 한 친구는 햇빛에 얼굴 타는 게 싫다며 방에 남았다. 미안해할 상대방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배려와 돌봄은 훌륭한 상호작용이고, 인간의 존엄함을 만들어 내는 한 편의 ‘퍼포먼스’라고 작가는 비유했다.
퍼포먼스는 어떤 일의 ‘수행’에서부터 예술 장르로서 ‘행위예술’에 이르기까지 넓은 뜻을 담은 개념이다. 돌봄을 퍼포먼스에 비유하는 건 어떤 담론적 효과가 있는가? 돌봄을 퍼포먼스로 보면 어떤 변화를 촉발하는가? 돌봄을 퍼포먼스로 본다면, 돌봄을 받는 당사자의 행위주체성과 상호작용을 강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돌봄을 요청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개인의 자립을 해치는 일도 아니라고 여러 번 되뇌어도 왜 돌봄을 받는 사람은 주눅 들기 쉬울까? 엄마는 왜 어지러우니 휠체어를 조심해 밀어달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호기롭게 “뮤슈!”를 외친 김지우도 처음부터 그러진 못했다. 휠체어로 혼자 지하철을 타고 멀리 돌아다녀 본 다년간의 경험에서 얻은 노하우를 여행길에서 발휘한 것이었다. 돌봄을 하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까 봐서 어디가 불편하다고 잘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까탈스럽게 군다고 할까 봐 마음이 졸아든다.
능력에 따라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늙은 몸, 병든 몸, 장애가 있는 몸은 쉽게 쓸모없는 몸으로 치부된다. 한편으로는 휠체어 사용자에게 접근성을 제공하고, 장애인 고용을 확대하는 제도가 작동하지만, 사회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경계는 여전히 강고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뤄지는 돌봄은 ‘권리’가 아니라 ‘시혜’로 미끄러져 가기 쉽다. “시혜가 아니라 권리”는 장애인권리운동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원칙이고, 보편적 돌봄에 관한 논의와 제도는 장애운동의 이 원칙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추상적 이념은 몸과 몸의 부딪힘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행되어야 비로소 ‘감각’될 수 있고, 이런 감각이 ‘쌓여야’ 사회가 바뀔 수 있다. 돌봄을 퍼포먼스로 보는 인식은 돌봄받는 쪽과 돌봄하는 쪽의 ‘협업’으로 돌봄이 수행된다는 당연하지만 자주 잊히는 사실을 환기한다. 돌봄받는 사람은 당사자로서 자신의 상태, 기분, 욕구, 희망에 대해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돌봄하는 사람도 대응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 그러려면 돌봄 제공에 노동으로서의 정당한 가치 매김이 주어져야 하고, 그럴 때 돌봄 노동자는 좋은 돌봄 퍼포먼스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돌봄 노동자의 노동조건, 임금 수준, 자긍심 같은 요소는 돌봄 퍼포먼스를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2025년 7월 18일부터 20일까지 대학로 이음센터 이음갤러리에서 〈숨, 쉬는 몸. 독립으로 의존〉라는 전시가 있었다. 장애여성공감 부설 장애여성독립생활센터 ‘숨’이 주관하고 노들장애인야학,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협력해 만든 전시로서 시설에서 자립한 장애여성들의 삶을 통해 돌봄과 의존의 관계를 다시 보자고 제안하는 기획이었다. ‘움직이고 관계 맺는 몸’, ‘숨 쉬는 몸’, ‘독립으로 의존하는 몸’ 등 세 개의 세션으로 나눠진 전시는 대구와 부산에서 자립생활하는 장애여성들이 애쓰면서도 즐겁게 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누구에게나 삶을 스스로 꾸려가는 자립은 쉽지 않다. 장애인에게도 비장애인에게도 매끄럽고 완벽하게 독립한 삶이 있을 리 없다. 전시는 울퉁불퉁 튀어나온 부분을 ‘정상성’에 맞춰 깍아내고 사회에 적응하는 대신 생긴대로 꼬인대로 살고 싶다는 열망을 잘 보여 주었다. 탈시설을 하고 익숙하게 살아왔던 세계와 단절하는 삶,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삶을 유예하지 않겠다는 결단, 사회가 함부로 쓸모없다고 규정하는 무례함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당당함이 느껴지는 전시였다.
돌봄을 고민하는 와중에 본 이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기저귀의 벽’이었다. “엉덩이 상처도 내 삶”, “걸리는 여기저기 인생 내 몸도 네 몸도 안 걸리는 게 없다”, “동의없이 수술하지 마” 등의 문구를 적은 기저귀를 벽에 걸었다. 쓰지 않은 하얀 기저귀가 아니라 사용감을 표현하는 색깔을 칠한 기저귀였다. 안내해준 장애여성공감 활동가의 말처럼 ‘기저귀’는 장애 당사자에게 중요한 문제다. 신변처리를 혼자 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이 활동지원사에게 몸을 맡길 때 돌봄받는 자와 돌봄하는 자 사이에 합(合)을 맞춰 훌륭한 퍼포먼스가 나오기 위해서는 돌봄받는 자의 필요와 욕구가 지워져서는 안 된다. 벽에 걸린 사진과 텍스트들은 돌봄받는 장애여성들의 필요와 욕구를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기저귀를 교체할 때 저는 교체하고 싶지 않은데 시간 맞춰서 할 때가 있어요. 제 의사를 먼저 물어봐야 해요”, “상처가 있는 숨기고 싶던 활동지원사에게 찍어달라 한 내 엉덩이. 오래 들여다보거나 만지는 건 불편해요. 엉덩이 관리법 계속 찾는 중”, “불안하면 똥이 안 나와요. 다른 일 먼저 하고 오세요. 빨리 오시지 말고 천천히 오세요. 내가 연락할 테니까 전화기를 들고 가세요.” 이런 말들이 편하게 발화되고 수용될 때 상호작용에 기반한 좋은 돌봄 퍼포먼스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숨, 쉬는 몸. 독립으로 의존〉 전시 전경과 기저귀의 벽 ⓒYeom_2025 
〈숨, 쉬는 몸. 독립으로 의존〉 전시 중에서 ⓒYeom_2025 돌봄을 퍼포먼스에 비유하는 시각은 돌봄에서 얼마간 무거움을 덜어 내주지 않을까?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양육, 노인돌봄, 장애돌봄 같은 돌봄의 무게를 결코 가벼이 봐서가 아니다. 오히려 무겁기 때문에 가볍게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돌봄은 누구나 받고 싶어 하지만 누구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돌봄이 노동으로 셈해지지 않고 사랑과 열정의 이름으로 돌봄 제공자를 착취하고 있는 현실도 여전하다. 돌봄의 값이 제대로 셈해지지 않는 원인 중 큰 부분인 젠더화된 노동으로서의 돌봄이라는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보편적 돌봄의 제도를 마련하고 돌봄 서비스의 수혜자를 확대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문제들을 몰라서가 아니다. 제도를 제대로 갖춘다 해도 결국 대면 돌봄이 실행되는 현장에서는 악기를 합주하듯 서로의 합을 맞추는 것이 돌봄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노인부터 중증장애인에 이르기까지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 ‘무능한 인간’, ‘부족한 인간’, ‘살만하지 않은 삶’으로 낙인찍히지 않고 자신의 필요를 드러내고 도움받기 위해서는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돌봄노동의 가치평가와 돌봄과 연대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의 확립이 필수적이겠지만, 여기에 더해 돌봄을 개인과 개인의 관계성 속에서 펼쳐지는 퍼포먼스로 인식하고 더 좋은 퍼포먼스를 향해 서로의 상태와 욕구를 알아차리고 반응하는 ‘감각’을 만들어 내는 일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만 우리는 인간의 근원적 취약함을 인식한 위에 서로를 부축하는 돌봄의 관계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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