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장애와 모성, 그 대척점 사이에서

webzinepas 2022. 9. 1. 00:00

백선영

 

우영우 신드롬, 반가운 것과 반갑지 않은 것

 

주류 사회에서 장애가 존재하는 방식은 양면성이 있다. 기존의 서사는 장애를 얼마나 그럴듯하게 묘사하는가라는 기준을 두고 개개인의 연기력들만 엿보게 하는 온정적, 시혜적 시각에서 그려진 극복 서사였다. 특히 발달 장애인들은 지적 장애인을 웃음거리로 비하하거나 극소수에 불과한 서번트 증후군의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장애인들로 그려왔고, 이들이 가진 정체성들을 삭제시키거나 장애 자체를 재난으로 묘사하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현재는 장애를 가진 주체들이 전면에 등장하는 서사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최근 우리들의 블루스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속에서는 어떤 특정한 능력을 뛰어나게 갖춘 발달장애인으로 그려지는 면에서 기존 서사와 같은 출발점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서사들은 장애를 둘러싼 사람들의 시각에 여러 파장들을 던진다. 단지 폐만 끼치는 존재로 인식되었던 장애인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을 능력껏 영위하며, 장애가 평범한 일상 속으로 충분히 스며들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허구의 이야기들이고, 실체적 진실을 얼마나 보여줄 것인지는 창작자가 결정하는 것이지만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장애는 비장애 정상성이라는 강력한 자장 속에 아무렇지 않게 진입하고, 이를 해체시키는 방식 역시 평화롭다. 설사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한들, 그것만으로 주류 사회에 프리패스하는 장애인들은 현실에서는 아무도 없다. 또한 선하고 능력 있는 사람에 대한 선호와 함께 코드화되는 장애는 특정 유형의 모습으로써만 각인시키기도 한다. 급기야 발달 장애 아동을 둔 양육자에게 이제 이런 질문까지 날아오고 있다. “그러니까 당신은 왜 우영우처럼 못 키우는데?”

 

 

신경 다양성과 규범

 

발달 장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신경 다양성이라는 개념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미세한 신경 발달의 차이가 몸에 가져오는 여러 영향들이 결핍이 되는 것은 신경전형인들 중심에서 기획된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신경전형인들의 세계는 전복될 가능성이 있는 부당한 권력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인간의 발달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모든 것은 발달사중심으로 서술되니까.

 

수많은 유형의 장애 속에서도 발달 장애는 아주 다른 질적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발달의 기준을 신경전형인에게 맞추는 것, 그런 사람들이 지킬 수 있는 규범적 토대 위에서 사회를 구성해온 동력은 그렇게 살기 어려운 사람들을 억누르는 어마 무시한 힘으로 작용한다. ‘사람이라면 최소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합의 같은 것,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규범은 대체로 암묵적이다. 발달장애인들은 더더욱 암묵적인 규범들을 인지하고,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끝없는 마찰적인 상황에 놓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합의를 깨야 할까, 어렵더라도 지키자고 해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누구에게로 향해야 할까? 아이가 보이는 모든 문제 행동들의 원인은 양육자에게서 온다고 여기는 사회다. 비장애 아이들을 양육하는 가정에게도, ‘타인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강한 사회는 일종의 강압적 규범이다. 발달장애인들이 보이는 다양한 반응들을 전형적인 민폐로 해석하는 공간에서, 장애를 갖고 있는 당사자와 가족들은 더욱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코로나 유행기에 마스크를 쓰기 어려운 발달장애인들의 상황에서, 적절한 강화의 방법을 모르는 양육자나 가족들은 마스크를 쓰도록 온갖 시도를 해보거나 아예 외출을 포기했다. 여기서 발달장애인 같은 마스크를 쓰기 어려운 사람들은 쓰지 않아도 된다는 예외 규범이 등장했다. 규범이 새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발달장애인이 등장하는 방식은 이렇듯 늘 예외혹은 제외일 것이다. 규범의 불가피함을 판단한다면 필요한 내용이지만, 문제는 공표되기까지의 여러 과정이 생략됐다는 점이다. 편견과 배제를 만들어내지 않으면서 이런 예외의 규범들을 발달장애인들을 상대로 목록화하는 것, 발달장애인 개개인이 보일 수 있는 특정 유형의 행동 패턴에 대해서 사회 구성원들이 익혀가는 것, 그리고 선언하는 방식으로써 제외가 아니라 이들이 갖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지원과 다양한 반응들에 대한 존중으로 합의해 나가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우연히 만나는 사람이 특정 개인의 행동들을 깊이 있게 탐구하며 대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패턴화된 행동들에 익숙해져 있는 이들에게 그 행동을 소거시키는 것 역시 어렵고 폭력적일 수 있다. 둘 사이의 공존이 더 이상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사회 스스로 조직해나갈 역량은 없는 걸까?

 

Ivan Navarro 작(作) Nebula I ⓒYeom_세화미술관, 서울_2022

 

온전한 해방이란 있는가

 

나는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를 양육하고 있다. 솔직히 아이를 통해서 이해하게 된 발달장애는 단지 삶의 다양한 일부분이 아니다. 타자가 전하는 스트레스를 다 받아내며, 나를 괴롭게 하는 타자를 내가 이해하고, 그 타자에게 세상을 이해시켜야 하는 노동으로 이어진다. 이 불친절한 환경 속에서 부딪히고 겪으면서 장애를 수용해가는 과정은 아주 고된 노동의 연속이다. 내 삶을 형성해온 기반들을 뿌리째 뒤흔들며 현재 나의 위치를 깨닫게 한다. 입으로 해방을 외치면서 끝없이 아이 양육에 메달리며 어린이의 행동 범위를 설정하고 제한하고 통제하는 모순. 중첩되는 여러 모순들은 결국 현재의 나에게 외려 더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건 모성이라는 생각에서 정점에 달했다.

 

인간의 특성들을 온전히 이해하고 수용하며 더 힘들어지지 않게 적절히 관리하면서도 그 특성들을 존중해주는, 끝없는 인입과 경계 짓기의 과정. 타인과 산다는 것은 이런 과정의 연속이지만, 모성을 강요하는 가부장 사회, 정상성에 천착하는 비장애 중심 사회에서 발달장애가 있는 아동과 함께 살아야 하는 엄마역할로 수용할 때 그것은 그저 어려운 숙제고 삼중 사중의 벽일 뿐이다.

 

희생의 아이콘이라 말하며 나와 장애를 동일시하는 모성, 아이를 나의 소유물로 착각하여 타인의 생조차 나의 의지로 끝내버리려고 하는 잔혹하고도 비뚤어진 모성, 그 어느 편에도 있지 말아야 하지만, 그 모든 곳들에 발을 걸치고 있는 것 같다. 장애는 타자를 이해하는 도구이며 세상을 다시 보게 하는 힘이기도 하지만, 장애가 있는 아이를 둔 내게는 가족으로 단단히 묶여야 하는 강력한 모성을 발휘해야 하는 기제이기도 하다. 개인 대 개인의 서사를 떨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나의 실존적 위치가 있기 때문이다.

 

장애를 타자화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동시에 거리두기를 해야 내가 해방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모순. 어느덧 강력한 타자성으로 두어야만 그게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와 다른 타자를 구별하고 그 상태를 인정하는 것, 특정한 상황에서 모두가 동일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것은 비합리적 신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장애는 몸 자체가 갖는 특성임과 동시에 그것들을 둘러싼 환경과의 상호작용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어떤 환경을 구성하느냐에 따라 아주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날 수 있다. 가진 자들의 막대한 이익들을 변호하는 변호사나 경쟁에 찌든 권모술수적 인물일 수도, 역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열차를 멈춰 세우는 가열찬 활동가일수도, 내가 편안해하는 일상생활이 힘들어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장애는 이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그러나 조직된 장애인들의 저항은 안 되고, 우영우 같은 천재성을 지닌 변호사의 고난 극복기는 가능한 지배적이고도 고루한 시각은 결국 정상성을 갖춘 장애인만 환대하는 편의적 결과만을 낳고 있다. 1부터 100까지 아이를 향한 말들이었던 모든 사회 규범에 대한 약속들이 왜 갖은 애를 써도 지키기 어렵다는 사실을 밖으로는 내뱉지 못했던가. 왜 발달장애인에게는 지키기 어려운 과도한 규범을 강요하고, 특정 유형의 장애인으로만 끼워 맞추려 하는가.

 

완벽하게 무해한 관계는 없고 그런 유형의 사람도 없다. 세상이 진공과도 같은 상태라면, 누구나 평등하고 같은 관계 속에 놓여 있다면 이런 고민 자체가 불필요할지 모른다. 거부하고 싶은 노동과 내게 끝없이 주어지는 숙제 사이에서 완전무결한 대안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설사 유토피아가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장애는 여전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수 많은 것들을 직면하게 할 것이다. 나의 위치와 상태, 존재를 자각하면서 타자를 수용하지만 선을 긋는 일, 여러 지점에서 팽팽하지만 또 그런 팽팽한 대척지점의 관계들을 짊어지며 가는, 나를 당기는 줄로부터 느슨히 놓기도 하고, 조이기도 하는 삶들을 사는 것. 다만 필요한 건 매 순간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 우영우가 드라마 속에서 읊조리던 대사인데 나에게도 적용된다는 생각이 든다. 끝없는 의식적 노력과 실천이 그나마 해방에 근접하게 할 것이다. 그것만이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