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주제

폭력은 체제를 담고 있다

webzinepas 2022. 9. 1. 00:00

 

 

고정갑희

 

 

폭력은 체제를 담고 있다. 폭력은 체제의 증상이다. 폭력이 있는 곳에 체제가 보인다. 그 체제를 보고 바꾸려는 노력이 있어야 거듭되는 폭력이라는 증상이 사라질 수 있다. 폭력의 증상을 보고 구조를 보는 일은 체제를 변혁하는 일이기도 하다. 폭력은 또한 현재 지구지역적(glocal)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코드 중 하나다. 필자가 최근에 만난 고어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고어와 자본주의를 연결하면서 폭력을 영화적 재현으로 소비하거나 우리의 일상과는 거리가 먼 어떤 조폭들의 세계로 보려는 시선을 비판한다. 이 글은 범죄와 폭력, 폭력과 경제에 대한 생각에서 출발하면서 폭력의 체제적 성격을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폭력에 대한 대항-대안 행동철학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구조들 ⓒsoo_서울_2020

 

고어 자본주의범죄계급

 

고어 자본주의트랜스페미니스트로 자신을 정체화하는 멕시코 출신 사야크 발렌시아가 공포영화에서 빌려온 고어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제시한 개념이다. 그는 멕시코, 특히 미국과의 국경도시 티후아나에서 벌어지는 폭력이 예외적이거나 단편적 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근대성의 구조적 특성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폭력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리고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자본주의 담론은 장기와 같은 신체의 교환, 신체와 시신이 상품화되는 고어적 폭력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고 본다.

발렌시아에 의하면 멕시코라는 국가적-지역적 특수성에서 나온 고어적 폭력고어 자본주의의 특성으로 전지구적 범죄계급을 형성한다. ‘범죄계급이라는 새로운 사회계급 개념은 좀 더 숙고할 필요가 있지만 몇 가지 시사점을 던진다. 그 중 하나는 노동과 노동 아닌 것의 경계에 대한 시사점이다. ‘범죄계급고어적 폭력은 노동이라 불리지 않지만 자본주의를 구성한다. 또 다른 시사점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관한 것이다. 불법경제와 합법경제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은 국가 경계를 넘나드는 조폭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통해 드러난다. 그곳에서 합법약물과 불법약물이 생산되고 유통된다. 세계경제와 범죄계급이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은 체제와 폭력의 관계를 다시 보게 한다. 이 범죄계급은 세계경제의 하단부를 형성한다.

 

조직폭력과 주변화된 남성성의 범죄도시

 

나쁜 놈들 잡는데 국경 없다!” 20225월 한국에서 개봉된 <범죄도시2>의 홍보문구다. 두 달도 채 안되어 천만 관객을 동원한 이 영화는 국경을 넘어 움직이는 범죄자들과 그들을 쫓는 강력반 형사들을 다룬다. 초반의 배경은 베트남의 호치민시다. 이 도시는 한국의 범죄자들이 활동하는 무대가 된다. 화면 가득 살해된 시신들과 도시의 끈적한 공간들이 펼쳐진다. 범죄자의 손에는 짧은 단도나 도끼가 들려져 있다. 몸과 몸이 부딪히는 싸움과 살인의 공간은 피로 가득하다. 검은 자루에는 토막난 인간 신체가 들어 있다. <범죄도시2>가 호치민에 자리잡은 한국인 조폭들을 등장시킨다면 전편인 <범죄도시>는 서울 가리봉동의 조선족 조폭들의 세계를 다룬다. 한국사회의 인종차별을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이 영화 또한 천만 관객 영화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의 영화와 드라마들은 범죄를 그 제목에 정면으로 달기 시작했다. 1980년대의 한국의 군사정권이 조폭들과 자신들을 분리하기 위해 전쟁을 선포한 내용을 배경으로 하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2017년과 2022년이 되면 도시 전체가 범죄도시로 바뀐다.

국가는 자본주의가 생산한 고어적 폭력을 처벌하는 역할과 활용하는 역할을 동시에 하면서 체제를 유지재생산한다. 도시는 때로 공권력이 부재한 지대가 되거나 반대로 공권력이 폭력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공간이 된다. 실제 멕시코의 국경도시 티후아나와 달리 한국의 영화적 재현인 범죄도시는 아직은 범죄계급을 물리적 힘으로 제압하는 경찰국가의 세계다. 마석도로 출연한 마블리마동석의 헐크화된 물리적 몸은 서울 가리봉동을 넘어 호치민시에서 추격전을 벌인다. 전편인 <범죄도시>와 달리 <범죄도시2>(잠시 등장하는 박지영을 빼면) 지정성별 남성들의 집합체를 보여준다. 쫓기는 자도, 쫓는 자도 모두 남자들이다. 발렌시아를 빌리면 이들 범죄계급은 주변화된 남성성에 뿌리내린주체다. 이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실패자 혹은 부적응자로 머물지 않고 고어적 관행을 통해 그 주변화를 뚫고 나오려 한다. 이런 몸짓은 패권적 자본주의와 결탁한 헤게모니적 남성성으로부터 주변화된 디스토피아적 주체다. 영화 속의 무수한 장첸과 강해상들이 이 주체를 재현한다.

 

국가 경계에서 일어나는 폭력

 

고어적 폭력은 자본주의적 폭력의 양상을 구조적으로 살피는 단초가 된다. 일상은 폭력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기도록 교육받은 우리는 실재하는 현실적 폭력을 외면할 뿐아니라 일상의 폭력을 체제와 연결시키지 않는다. 자본의 폭력을 기존의 자본-노동의 생산관계로만 보려고 하면, 거기서 비껴나 있는 폭력들을 은폐하거나 개별적인 것으로 만든다.

자본주의적 폭력은 국가 경계를 통해서도 행사된다. ‘부유한 나라미국으로 건너가기 위한 사람들이 멕시코 국경에 있는 트럼프 장벽을 향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불법 미등록 체류자가 되거나 죽음을 맞이한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2021년 바이든 취임 후 미국 남부 국경에서 숨진 이민자들은 1천 명이 넘는다. 한 해 사망자는 728명이었고, 2022년 들어서도 340명이 더 숨졌다고 한다. 이와같이 트럼프 장벽을 넘어가려는 사람들의 죽음 또한 자본주의의 지구적 불평등 구조와 맞물린다. 이러한 장벽은 세계 도처에 있다. 지역적이지만 지구적인 현상이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지어짐과 흐려짐을 통해 체제는 재생산된다. 누가 합법성을 부여하는가. 국가의 경계는 법의 경계이기도 하다. 데리다의 법 앞에서가 말하듯이 법은 그 자체의 본질적인 내용을 갖지 않는다. 법을 선포하는 권력에 의해 법은 만들어지고, 법은 권력이 된다. 법의 문 앞에 선 자는 그 법의 문 뒤에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뒤는 비어있다. 금지된 국경을 넘은 자는 미등록 불법체류자가 된다. 동시에 이 이주민의 대열은 미국의 험한 노동을 담당하는 노동자들이기도 하다. 국가들의 자본주의적 분할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항시적 폭력이 될 수 있다.

 

최근 관람한 2022년 전주영화제 출품 다큐 <도쿄의 쿠르드족>은 쿠르드족 청년인 오잔과 라마잔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철거현장에서 일하며 모델을 꿈꾸는 오잔, 대학생이 되고 싶은 라마잔은 아주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왔다. 일본어를 하고 학교를 다녔지만 번번이 난민신청에서 거부된다. 1990년대부터 터키의 쿠르드족 난민이 일본 도쿄에 정착하기 시작하여, 현재 2천명에 달하지만 여전히 거의 대부분이 불법이민자. 난민의 경우, 국가의 법이 허용하면 시민이 되고, 허용하지 않으면 미등록체류자가 된다.

외교적으로는 난민을 수용하는 행동을 취하지만 내부적으로 난민을 다시 난민화하는 정책을 일본이라는 국가는 펴고 있다. 한국도 이러한 보여주기식 치졸함의 예외가 아니다. 그 속에서 폭력적 상황을 탈출한 사람들은 계속 유예된 삶을 살게 된다. 미등록체류자가 되어 감옥 같은 보호소에 몇 년씩 수용되기도 한다. 2019년 일본에서는 1만명 난민 신청에 44명만이 난민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승인율 0.44%OECD 최저로 기록된다. 최근 한국에 들어온 우크라이나 난민들과 그 이전에 특별기여자자격으로 온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에게도 또한 쉽지 않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재난과 자본주의를 관통하는 전쟁이라는 폭력

 

재난과 자본주의의 결탁은 구조적 폭력의 양상을 띤다. 이와 관련하여 나오미 클라인은 자본주의는 어떻게 재난을 먹고 괴물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클라인은 전쟁, 쿠데타, 주가폭락, 자연재해 등 충격적인 사건 이후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털어 부유한 이들을 더 부유하게 만드는 현상을 쇼크 독트린이라 이름 붙였다. 최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재난과 자본주의가 연결되는 뚜렷한 예라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인한 이 전쟁이 야기하는 폭력의 피해자는 일차적으로 우크라이나 국민들이지만 세계적으로 다양한 피해자들을 만들고 있다. 우크라이나 농업 붕괴는 남미의 곡물 가격 상승과 아프리카 빈국의 식량난 가중을 불러왔다. 또한 러시아 천연가스 공급망 붕괴는 에너지 가격 상승과 미국 의존도를 높였다. 결국 미국의 경제 패권 강화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경제학자 마이클 허드슨에 의하면 전쟁으로 야기된 에너지 및 식량 위기는 각국 국가 기반시설의 민영화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 유럽은 값비싼 미국의 액화천연가스(현재 사용 중인 러시아 천연가스 가격의 3-7) 수입을 위한 항만 시설 건설에 30억 달러를 지출하기로 했다고 한다. 유로화와 엔화 또한 가치하락을 겪었다. 러시아는 폴란드와 불가리아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중단했고, 유럽의 다른 국가들은 가스 대금을 루블화로 지불하라는 푸틴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있다. 허드슨에 의하면 러시아는 자급자족적 경제체제를 갖추고 있어 미국의 경제제재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는 중국과 인도 등이 서방 편에 서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국가적 경제생존능력이 강한 셈이다. (프레시안, 2022.05.16.참조)

이런 세계적 경제에 끼치는 영향을 넘어 전쟁이라는 폭력의 합법과 불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실상 합법과 불법의 경계라는 것이 세계질서에서 작동하는지 의심스럽다. 러시아의 침공 자체가 불법적 폭력인데 그렇다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또한 합법적인가? 그리고 나토 회원국이들이 무기를 제공하고 전쟁을 지속시키는 것은 합법인가?

 

 

자본주의-가부장체제의 폭력,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자본주의 혹은 필자의 용어인 <자본주의-가부장체제>를 폭력이라는 렌즈로 본다면 현 체제에 어떤 균열이나 파동을 만들 수 있을까. 폭력과 결탁한 체제의 양상에 대한 대항과 대안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발렌시아는 고어적 폭력과 결탁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 담론의 중추로 지정학적 상황에 기반한 트랜스페미니즘적 관점을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트랜스페미니즘적 저항은 생물학이나 정체성 중심 혹은 민족주의적인 요소에 기반하지 않은 동맹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리고 '퀴어 되기'를 향한 참여, 저항 배치의 파노라마를 여는 것이라 한다. 그는퀴어 다중이면서 이주민-성노동자-트랜스젠더페미니스트들을 트랜스페미니즘의 주체로 불러낸다. 그리고 미국의 교차적이고 메스티사 주체가 주축이 되는 제3세계 페미니즘(첼라 산도발, 글로리아 안살두아, 체리에 모라가 등)을 다른 경로로 이어가겠다고 한다.

 

필자는 폭력이 체제를 담고 있다고 제목에서 말했다. 이 체제는 고어 자본주의측면이나 재난 자본주의측면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 체제는 필자가 말하는 '성종계급체계'의 모순을 유지재생산하는 '자본군사제국주의 체계'를 포함한다. 따라서 체제적 증상으로서 폭력에 대한 대응은 트랜스페미니즘을 포함한 다수의 페미니즘을 포함하되, 그 너머로 주체를 확장해야 한다. 계급적, 성적 주체만이 아니라 종적 주체까지로 확장해야 한다. 종적 주체를 포함해야 한다는 말은 인간사회가 타종에게 가하는 폭력 또한 제대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지면상 다루지 않았지만 특히 '공장식 축산'이라는 자본주의적 폭력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 체제의 폭력에 대한 대응과 대안은 페미니즘을 넘어 마르크스주의-생태주의-페미니즘을 담지하는 '적녹보라/지구지역적 주체'로부터 나올 수 있다. 이 주체는 국가와 자본과 법이 성종계급체계를 조직적으로 형성해 온 구조와 그 폭력에 대한 대응을 실천하고 대안을 만들어 갈 주체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주체들을 통해 국가라는 이름의 폭력, 법이라는 이름의 폭력, 경제라는 이름의 폭력,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폭력 그리고 음식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대한 우리의 감지기가 더 예민하게 작동할 수 있는 실천을 적녹보라/지구지역적으로 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폭력적 증상을 너머 체제를 만나고, 그 체제에 대한 본격적 대항과 대안을 함께 설계함으로써 일상의 폭력을 바꿀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