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 직후 일본의 ‘낙태지시’와 여성들의 ‘임신중지’ 사이의 정치적 틈새
패전 직후 일본의 ‘낙태지시’와 여성들의 ‘임신중지’ 사이의 정치적 틈새
-후쓰카이치 보양소 답사를 통해 뒤늦게 마주한 전후의 실종된 재생산정의
심아정
히키아게(引揚げ, 이하 인양 혹은 귀환)는 전쟁과 식민지 종주국 국민으로서 해외에 살던 일본인이 패전 이후 귀국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패전 당시 해외에는 일본의 군인·군속 및 일반인이 660만명 이상 체류하고 있었다. 중국 동북부(구 만주)에서 소련군의 참전으로 전투에 휘말린 사람들이 비참한 상황에 처했던 경험은 일본 내에서도 가해국 국민이 겪은 ‘피해 서사’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다. 1946년 말까지 500만명을 넘는 이들이 귀환했고, 1958년 이후로는 개별적으로 돌아왔다. 열 아홉 개의 귀환항에는 1945년 10월 점령군 총사령부(GHQ)의 지령으로 후생성이 중앙 책임관청이 되어 인양원호국(이후 원호원, 원호청으로 변경)을 설치했다. 인양은 일본이 처음으로 경험한 매우 광범위한 집단적 인구 이동이었다.
지난 7월의 답사에서 후쿠오카현(福岡県) 지쿠시노시(筑紫野市)의 작은 온천마을에 남아있는 후쓰카이치 보양소(二日市保養所) 터와 위령시설, 관련 자료전시를 둘러보았다. 이번 칼럼에서는 답사 과정에서 조우한 장소들과 그 내력을 알아가는 자료의 독해 과정에서 생겨난 고민을 ‘실종된 재생산정의’라는 문제설정 하에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후쓰카이치 보양소는 패전 직후 만주와 조선 등지에서 귀환하는 과정에서 강간 피해를 당한 일본인 여성들의 임신중지와 성병 치료를 목적으로, 경성제국대학 관계자들이 기획한 의료활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시설이다. 이 시설과는 별도로 1945년 8월말, 일본의 후생성은 규슈 대학 산부인과 등에 극비리에 ‘낙태지시’를 내린 바 있다. 1940년부터 1948년까지 우생정책 상의 관점에서 ‘유전성 질환의 소질을 가진 자’에 대한 불임 수술을 규정하고 ‘건전한 소질을 가진 자’에 대해서는 임신중지를 제한했던 <국민우생법>, 즉 ‘낙태죄 체제’ 하에서 임신중지는 ‘불법행위’였고, 시술을 감행한 의사 또한 형사처벌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귀환항에서의 임신중지는 후생성과 인양원호청의 묵인 하에 이뤄졌기 때문에 당시에 의사나 여성이 기소되는 일은 없었다. 후쓰카이치 보양소에서만 약 500여 건의 임신중지 수술이 이루어졌다. 다른 귀환항 주변에도 유사한 시설이 개설되었지만, 그곳에서 겪은 여성들의 경험은 일본 전후사와 ‘위안부’ 담론을 비롯한 페미니즘 주류 담론의 관심사에서 주변화되어 왔다.
1977년에 폐쇄된 후쓰카이치 보양소가 있던 곳에 지금은 사단복지법인 재생회(済生会)가 운영하는 특별 요양 노인홈이 들어서 있다. 시설 관계자들이 후쓰카이치 보양소 관련 위령시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었는데, 주차장 한 켠에 어질 ‘인(仁)’자가 새겨진 커다란 비석이 보였고, 바로 옆에는 자그마한 위령시설(水子地蔵尊のお堂)이 있었다. 위령시설은 ‘미즈고(水子: 유산하거나 임신중지한 태아)’를 위한 것이었고, 해마다 5월 14일이 되면 이곳에서 자그마한 추모제가 열린다고 한다. 비석은 1981년에, 태아의 위령시설은 1982년에 세워졌다. 비석 뒤에 새겨진 글귀는 아래와 같다.
“쇼와 21년, 22년(1946년, 47년)에 하카타 항에는 매일같이 만주에서 귀환하는 배가 들어왔다. 그 중에 불행히도 소련군의 강간으로 임신한 여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구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관계자들이 이 여성들을 후쓰카이치 보양소에 데려와 선처해 주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센다 가코(千田夏光)의 르포르타주를 통해 알게 되었다. 당시 낙태가 법적으로 금지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직업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수술을 감행했던 의사들의 인도주의적 행위를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해 이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30년이 더 지난 지금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그녀들이 이곳을 방문해서 당시의 의사들과 간호사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을 때, 이 비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번역과 강조는 필자에 의함)
기괴한 문구다. 방문하기 전에는 이 비석이 후쓰카이치 보양소에서 사망한 여성들의 위령비인 줄 알았다. 한때 고등학교 교사였던 남성이 세웠다는데, 강간 피해여성들이 30년이 지나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도 황당하지만, 비석에는 의료진의 인도주의적이고 자발적인 의료행위를 상찬(賞讚)하는 내용만 적혀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여성들의 ‘위령비’가 아니라 의료진의 ‘공적(功績)을 기리는 비’인 셈이다.
귀환항에서의 임신중지에 대한 자료와 관련 전시 내용에는, 후쓰카이치 보양소에서 경성제국대학 관계자들에 의한 임신중지 시술이 인도주의적 의료 실천이고, 그 밖에 규슈 대학 등의 의료진은 ‘공중보건’의 차원에서 국가에 의해 ‘낙태 지시’를 받았다고 이분화하여, 경성제국대학 출신 의료진의 자율성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도 보인다.
그러나 애초에 강간 피해여성이 귀환하는 과정에서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피해여성들 자신의 바람으로 임신중지가 이뤄지기도 했지만, ‘불법 임신’이라는 진단명으로 호명되었던 소련군의 강간에 대한 ‘임신중지’는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국가의 기획이기도 하고, 소련군에게 위안시설을 만들어준 만주 개척단 남성 간부들의 개입도 있었으며, 가족 이데올로기와 남성성의 보전 강박 등이 중첩되어 모색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인터뷰 자료들을 보면 당시 ‘불법 임신’으로 태어나는 ‘혼혈아’는 국가에게는 패전을 가시화하는 살아있는 증거로서, 남성에게는 남성성을 위협하는 침략자로서, 여성에게는 성폭력 피해의 낙인으로서, 가족에게는 재통합을 방해하는 존재로서 인식되고 있었다. 성폭력을 전쟁에 수반되는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 간주하는 통상적인 인식은 이렇듯 폭력을 둘러싼 다양한 층위와 행위자의 존재를 비가시화하고 피해여성이 입은 낙인에 대한 이해 또한 가로막는다.
특히, 패전 직전 소련군의 참전으로 대혼란을 겪었던 만주 재류 일본인들은 소련군이 들이닥치면 일본인 여성은 강간을 당할 것이라는 불안이 커져, 소련군에게서 일본인 부녀를 지키기 위해 ‘희생해 줄 여성들=여자특공대’를 편성하자는 의견을 성매매여성들에게 종용했고, 이에 열세 명의 여성들이 ‘자진’할 수밖에 없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소련군에 의해 여성들이 강간 피해를 당하는 과정에서 창부 차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이 여성들을 이른바 ‘성의 방파제’로 삼은 일본인들의 공모에 대한 언급이 드물다는 것은 매우 문제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해국 일본인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라는 수사로 뭉뚱그려질 수 없는 경험들이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무사히 돌아온 여성들과 피해를 당한 여성들의 경험을 분리하거나 고통의 경중을 비교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러한 분리된 경험을 가능하게 만든 사회정치적 조건들을 젠더적 관점에서 다시 다루고자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1945년 귀환 전 겨울을 나면서 피난소 생활이 장기화되자, 일본인들은 소련군 측과의 협상을 통해 성매매 여성에게 소련군 전용 위안시설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인양원호국에 보고된 《만주인양사》에는 러시아군이 여성을 요구해 오면 미리 전용 시설을 설치하여 ‘특수직업’의 부녀자들을 투입함으로써 ‘미연에 화(禍)를 방지했다’거나, 그녀들이 ‘희생적 봉사’를 잘 견뎌내 주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일부 ‘특수직업 여성’과 ‘일반 여성’을 구분하여 전자를 방파제로 삼아 후자를 보호한다는 대책은 다롄(大連)에서 철수한 전 적십자병원 관계자의 증언에도 잘 나타나 있다.
당시의 후츠카이치 보양소에서 임신중지 수술에 참여한 간호사 요시다 하루요(吉田ハルヨ)는 강간피해로 임신한 여성들 대부분이 말을 잃은 상태였고, 마취약도 제대로 구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술을 받으면서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고 증언하면서, “이들의 경우는 자신들이 원해서 성매매를 한 결과로 임신한 ‘팡팡(パンパン. 패전 후 미군에 의한 점령통치 하에 있던 일본에서 주로 미군 병사를 상대로 성매매를 했던 가창(街娼))’과는 다르다”는 점을 굳이 강조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창부 차별이 내면화된 후쓰카이치 보양소의 간호사들의 에피소드를 인터뷰 자료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미 점령군의 아이를 임신한 ‘팡팡’ 여성들이 후쓰카이치 보양소를 찾아오면, “이곳은 당신 같은 여자들을 위한 곳이 아니”라며 문전박대를 하는 것을 본 목격담도 존재한다.
김학순의 증언으로 일본군 ‘위안부’ 관련 증언이 쏟아져 나오던 1990년대, 일본의 페미니즘 담론에서조차 귀환과정에서 강간피해를 당한 여성들의 경험이 수면 위로 올라와 공론화되는 일은 없었다. 역설적으로 역사주정주의자들이 ‘위안소’ 제도를 정당화하면서 “일본여성도 전시성폭력 피해자였다”라는 식으로 여성들의 경험을 횡령했다. 예를 들면,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는 《신고마니즘선언(新ゴーマニズム宣言)》(1999)에서 한국인 전 ‘위안부’여성들의 고발에 의문을 제기하고, 귀환한 일본인 성폭력 피해여성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침묵을 신중한 태도라며 치켜세웠다. 이는 피해여성들이 왜 입을 다물었는지, 애초에 왜 성폭력피해를 당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차단하는 기만적인 언설이다.
성폭력피해는 독신 여성들이 마주한 시련이기도 했다. 전쟁 전, 일본의 국가 정책에 따라 구 만주국으로 농업 개척민으로 건너갔는데,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징병되는 남성이 많아져 이민 정책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20세 미만의 남성들이 ‘만몽개척청소년의용군’으로 보내졌는데, 이들의 정착을 위해 일본 국내에서 많은 여성들이 파견되어 개척민들의 아내, 이른바 ‘대륙의 신부’가 되었다. 구 구로카와 마을의 개척단에서 일본인들은 중국인의 습격을 방어하기 위해 소련군에게 보호받는 대가로 ‘성접대’를 고안했고, 이때 개척단 남성 간부의 판단에 따라 미혼의 젊은 여성들이 소련군에게 제공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낸 연구들도 있다. 낙인을 두려워한 피해여성들은 침묵 속에서 살아왔지만, 고령이 되면서 성폭력 피해의 실상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제껏 일본에서는 개척단의 역사나 패전의 혼란으로 인한 비참한 도피의 실상을 밝히는 책들이 많이 출간되었지만, 여성의 시각에서 서술된 책은 거의 없고, 특히 왜 많은 여성들이 구만주로 건너가야 했는지, 왜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는 오랜기간 언급되지 않았다.
누군가를 폭력에 노출시켜 다른 누군가의 안위를 확보한다는 남성’들’의 발상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 허용 가능성’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허용 가능하고 정당화될 수 있는 피해를 판단하는 분계선은 어디인가를 가늠하는 것 자체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성의 방파제’라는 개념은 배제되어 마땅한 존재들의 외연을 상정하는 무시무시한 상상력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후 어떤 법정에서도 ‘피해’로 간주되지 않는 경험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편, 외지로부터 귀환하는 여성들과 미군 점령하에서 성매매로 생계를 이어가던 여성들의 임신중지가 크게 늘었던 시기에 일본의 인구정책은 ‘낳자 늘리자’에서 인구억제정책으로 전환되었다. 1948년에 공포되고 시행된 〈우생보호법〉은 임신중지의 자유를 말하면서도 ‘국가가 허락하는’ 임신중지의 범위를 한정 짓는, ‘재생산권의 통제’라는 이면을 갖는 법이다. 후지메 유키는 이러한 〈우생보호법〉에 대해 “불량한 자손을 배제하기 위해 낙태를 허가한다는 낙태죄의 보완법이며, 우생학에 의한 생식통제법”이라고 비판하면서, 〈국민우생법〉을 계승한 이 법이 보수계 의원과 관료들에게 강력한 지지를 얻은 이유는, 일본으로 귀환하는 길에 소련군, 중국인, 조선인에게 강간당하거나 점령군에 의한 강간 혹은 성매매로 (미군병사의 아이를) 임신한 여성들이 ‘혼혈아’를 낳는 현실에 대한 혐오와 기피가 적잖이 작용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후지메는 인종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우생사상과 그에 기반한 여성의 신체 관리라는 맥락에서 해당 시기의 임신중지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후생성의 관련 자료에서는 귀환과정에서 발생한 원치 않은 임신을 ‘불법 임신’으로 명명하는데, 이는 패전과 그에 따른 결과로 발생한 폭력의 책임을 여성들에게 전가하는 저열함이 드러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임신중지에 관여했던 한 관계자는 이러한 국가적 기획이 “일본 정부가 부모 없는 혼혈아의 출생과 성병의 증가를 막기 위해 고안한 ‘국경 전략’이라고 불러야 할 ‘예방’의 방법"이며, 후생성과 정부 관리들은 이러한 ‘초법적 조치’를 지지했고, 이는 결국 “일본 국민의 순혈을 확보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임신중지에 대한 여성들의 바람은 재생산 통제를 위한 국가 정책과 길항하며 때로는 포섭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전쟁의 결과로서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거절하는 여성들의 바램이 우생학과 인종주의적 차별에 기반한 국가의 재생산권 통제와 조우했던 순간들 뿐만 아니라, 귀환과정에서의 성폭력 피해를 둘러싸고 어떠한 공모와 차별의 힘들이 여성들의 몸을 억압했는지 섬세하게 되짚어보는 작업은 ‘전후(戰後)’라는 시간대가 어떤 여성들에게는 흐르지 않고 고여 있다는 것, 전쟁이 끝나도 그녀들의 몸에서 전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준다.
귀환과정에서 강간 피해를 당한 ‘가해국 일본인 여성들’로 매끄럽게 범주화되지 않는 여성들의 사례를 통해 ‘전후’라는 시간 속에서도 여성의 몸 그 자체가 재생산정의를 둘러싸고 국가의 통치, 가부장주의, 남성성과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길항하는 또 하나의 장(場)이 된다는 것, 그리하여 모든 전쟁은 여성’들’에 대한 전쟁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싶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 또한 여성‘들’에 대한 전쟁이라는 점을, 여성’들’의 몸이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전쟁이 치러지는 치열한 전장(戰場)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고 함께 부여잡고 싶다. ‘전투’로만 상상되는 경험이 전쟁이라면, ‘전장’은 전투에서 후경화(後景化)되거나 생략되는 존재들이 계속 살아내야 할 장소이자 몸에 아로 새겨진 기억이기 때문이다.